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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회보

{5월의 독립운동가} 송학선(宋學善) 선생

담당부서
자치지원과 (032-440-2430)
작성일
2003-09-30
조회수
1061
송학선(宋學善) 선생
(1897. 2. 19∼1927. 5. 19)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송학선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897년 2월 서울에서 태어난 선생은 일제 침략과 수탈로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반일의식을 갖게 되었다. 특히 일제의 민족적 차별 대우와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를 흠모하면서 반일 민족의식을 더욱 성장시켜 갔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압제 하에서 암울하게 살던 마지막 황제인 융희황제가 1926년 4월 26일 붕어하자 반일의식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여 반일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하기로 결심하고, 그 계획을
실행하였던 것이다.
우선 신문이나 책에서 사이토의 사진을 보고 용모를 익혔고, 거사에 사용할 칼을 입수하여 준비를 마쳤다. 나아가 사이토가 융희황제의 빈소를 찾아 조문할 것을 예상하고, 빈소가 차려진 창덕궁 주변에서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그를 기다렸다.
드디어 4월 28일 일본인 3명이 탄 무개차가 창덕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들을 사이토 총독 일행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문상을 마치고 금호문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뒤따라가서 저격하였던 것이다. 칼을 빼어들고 차에 올라 중앙에 앉은 자를 사이토로 생각하여 저격하려다가 이를 제지하는 자를 찔러 쓰러뜨렸다.
그리고 중앙에 앉은 자를 찌른 뒤 사이토를 처단하였다고 생각하고 몸을 피했던 것이다. 재동으로 피하다가 뒤쫓아오던 한인 순사를 찔러 넘어뜨리고, 다시 일본군 헌병 및 일경들과 격투를 벌였다. 그러다가 중과부족으로 일경에 붙들리고 말았지만, 불굴의 저항의지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융희황제의 붕어로 고조되어 가던 반일 민족의식을 격앙시켰다.
취조 과정에서 저격한 인물이 사이토 총독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지만 자신의 거사 동기와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 일본인 재판장이 "칼은 무슨 목적으로 가져갔는가. 강도질할 목적은 아니었는가"라고 묻자, 선생은 "창덕궁이든지 어디서든지 총독을 암살할 목적으로 가지고 왔었소"라고 반박하였던 것이다.
결국 1926년 7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받고, 이듬해 5월 1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30살의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선생의 의거는 가깝게는 6·10만세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고, 멀리는 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자주 독립의지를 심어 주었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5월 한 달간 전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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