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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회보

{7월의 독립운동가} 안재홍(安在鴻) 선생 (1891. 12.30∼1965. 3. 1)

담당부서
국가보훈처 (--)
작성일
2003-10-05
조회수
1227
{7월의 독립운동가} 안재홍(安在鴻) 선생 (1891. 12.30∼1965. 3. 1)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안재홍 선생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891년 12월 경기도 진위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린 시절 가숙에서 한학을 배웠다. 17세부터는 황성기독교청년회 학관에 입학하여 3년간 신학문을 수학하였다. 전통 학문의 토대 위에 근대 학문을 접목하면서 이상재·남궁억·신채호
등 계몽운동가들의 교화를 받아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경술국치 직후 일본에 유학하여 청산학원과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서 선진 학문을 수용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인 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여 한인 유학생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벌였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1914년 여름 귀국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에 투신하였다. 민족자본을 육성할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산직장려계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3·1운동 직후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를 지원하고 후원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것이다.

서울에서 비밀결사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하여 총무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에 국내 정세를 보고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전달하였다. 나아가 임시정부의 국내 통치와 공작 활동을 지원하다가 피체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1922년 출옥 후에는 조선물산장려회에 참여하여 민족자본과 민족경제의 육성에 힘쓰는 한편, 언론 기관에 종사하며 새로운 활동 분야를 개척해 갔다. 시대일보·조선일보 등에서 논설기자·주필 등으로 활동하면서 사설과 시평을 통해 민중계몽과 민족의식 고취에 애썼다.

1920년대 중반 자치론이 고개를 들자 이에 대항하여 민족협동전선체로 신간회를 결성하는데 앞장섰다. 비타협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합작을 통하여 1927년 2월 신간회를 탄생 시킨 것이다. 나아가 조사연구부 간사로 민족운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1929년 11월에는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를 개최하려다가 피체되어 재차 고초를 겪었다.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소되고, 만주침략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어 정치운동이 불가능해지자 국사와 국어, 그리고 고전 연구에 심혈을 쏟았다. 조선상고사를 저술하고 여유당전서를 교열 간행하면서 조선학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정기를 사수하고 선양해간 것이다.

아울러 청년 학생들의 중국 군관학교 입교를 알선하여 독립군 사관 양성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조선어학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피체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8·15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국민당·좌우합작위원회 등을 통하여 좌우세력을 아우르는 통일민족국가 수립에 노력하였다. 나아가 경기도 평택에서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6·25전쟁 중에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어 1965년 3월 1일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7월 한 달간 전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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