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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회보

{9월의 독립운동가} 고이허(高而虛) 선생

담당부서
자치지원과 (032-440-2430)
작성일
2003-10-05
조회수
1391
{9월의 독립운동가} 고이허(高而虛) 선생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고이허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902년 9월 황해도 수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 학생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표출하였고, 그로 인해 일경의 수배를 받았다. 이에 러시아로 건너가 선진 학문을 수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망명 도중 만주 길림에서 대종교도이자 정의부 지도자인 김진호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영향으로 길림에 눌러앉아 1920년대 중반부터 회덕농우회·삼성학교·남만한인청년총동맹, 그리고 정의부에 참여하여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농민계몽과 민족교육운동, 그리고 독립운동을 펼쳐간 것이다.

특히 독립운동 이념으로 확고한 민족주의 사상과 신념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1929년 정의부를 중심으로 하는 삼부통합운동을 추진하여 국민부와 조선혁명군, 그리고 조선혁명당을 조직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나아가 1930년대 중반까지 국민부 집행위원과 중앙집행위원장, 조선혁명당 집행위원과 중앙집행위원장, 그리고 조선혁명군정부 중앙집행위원장 등으로 활약하였다. 즉, 당·정·군 체제의 중추 간부로서 한인동포들에 대한 자치행정과 항일무장투쟁을 주도, 관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36년 12월 남만주 보달원 서건구자에서 일본군토벌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부상을 입고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1937년 2월 17일, 봉천성 밖 동릉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이때 나이 불과 35세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9월 한 달간 전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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