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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오늘 3월 26일은 안중근 순국일

작성자
안 * * *


작성자 : 안정은 (제안자)

주 제 : 식품 안전

제 목 : 하얼빈역의 총성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하얼빈 방문 소식을 들은 것은 1909년 10월 중순이었다. 이토는 한국과 만주 몽골 지배를 놓고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협상할 예정이었다.
안중근은 의병부대장 최재형의 집에 머물며 거사준비에 들어갔다.
최재형의 딸 최올가 페트로브나는 당시를 이렇게 전한다.

“ 언젠가 민족 혁명가들 중 한명이 우리집에서 지냈다. 그를 안 인사(안중근)라고 불렀다. 그는 벽에 3명의 모습을 그려 놓고 저격 연습을 했다.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토크(현 러시아)에서 의병 전우 우덕순을 만나 “ 이토를 처단하자 ” 고 제안하자 우덕순은 그 자리에서 동의했다.
1909년 10. 21일 열차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이들은 22일 밤 하얼빈(현 중국)에 도착, 국민회 지부장 김성백의 집에 묵었다.
10. 23일 조도선을 합류시킨 안중근은 이발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모습을 남겨두고 싶었던 것이다. 이어 대동공보 주필 이강(李剛)에게 거사계획을 알리는 편지를 쓰고 즉석에서 장부가(丈夫歌)를 지었다.

‘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 때가 영웅을 짓고 영웅이 때를 만든다 / 천하를 굽어 봄에 어느 날에 대업을 마칠거나 / 동풍은 점점 차가워지나 장사의 의기는 뜨겁도다..... ’

1909년 10. 24일 아침,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은 남행열차를 타고
지야이지스고(중국명 : 蔡家溝)역까지 갔다. 현장답사를 통해 이토의 동선을 확인한 안중근은 두사람을 그곳에 남겨두고 25일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열차가 먼저 도착하는 지야이지스고역에서 기회를 엿보다가 실패하면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거사한다는 2단계 작전이였다.
1909년 10. 26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이토가 탄 특별열차는 예상대로 새벽 5시경 지야이지스고역에 정차했다. 수상한 한인들의 움직임을 눈치챈 러시아 헌병들이 우덕순 등이 묵고있는 구내매점을 봉쇄해 1차 거사는 실패했다. 안중근은 아침 7시경 추위로 얼어붙은 하얼빈역으로 향했다.
하얼빈역에는 러시아 병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폈으나 검문은 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대합실 찻집에서 작전을 구상했다. 9시경 열차가 도착했다. 군악대의 연주 속에 자그마한 노인이 열차를 내려와 의장대를 사열하자 러시아 병사들이 발을 구르며 경례를 붙였다. 하얼빈 거주 일본인들이 일장기를 흔들며 “ 반자이(만세)”를 연호 했다.
‘ 저 놈이 이토다 ’ 안중근은 주머니 속의 권총을 움켜쥐고 도열한 러시아 병사들 뒤쪽에서 이토를 향해 걸어갔다. 두사람 거리는 불과 10여 보(步), 안중근은 권총을 뽑아 이토의 오른쪽 가슴을 겨냥해 세발을 쏘았다. 두 개의 총알은 가슴에 세 번째 총알은 복부에 박혔다. 이토의 허리가 꺽어지며 무너졌다. 이토가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안중근은 권총을 던지며 외쳤다.
“ 코레아 우라 !, 코레아 우라 !, 코레아 우라 ! (한국 만세) ”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15분만에 절명했다.

구 태 훈 (성균관대 교수, 일본사 )

-- 2009. 10. 22(목), 조선일보, “ 제국의 황혼 ‘ 100년전 우리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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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듬해인 1910년 2. 14일 : 안중근 사형선고
* 1910년 3. 26일 : 안중근, 교수형으로 순국

* 이후 10년 후인 1919년. 1. 21,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황제가 승하했다. 갑작스런 죽음, 독살설은 전국으로 퍼졌고 이는 곧 3. 1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는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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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안정은 (제안자)
주 제 : 식품 안전

제 목 : 거꾸로 읽어보는 역사


21세기 단상(短想)


해경함장으로 1974년(5월 28일), 육영수 여사께서 돌아가신 해,
* 동해안(속초 부근)에서 실종된 나의 아저씨, * 안정열씨.
가족 중에서 가장 똑똑하고 용감하셨다.
조달청에 다니는 여직원과 결혼 후 자녀 둘을 낳고 화목하게 지내시다가 근무 중 바다에서 실종된 것이었다.
“금강산도 가고 이산가족도 만나는데 영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아마 그 때 죽었는가 보다...” 고 1년전에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참 어처구니가 없는 생각이었다.
당시에는 북한의 소행이라고 신문에 대문짝 같이 나왔었다.

내가 통신대학에서 공부하면서 간부로 일하고 졸업하기
한해 전(1983년), 해외연수로 동남아시아에 나가기 전, 아웅산 폭발사건으로 한국의 각료가 대부분 죽었다. 홍콩의 잡지와 한국 국내의 신문기사가 이 사건을 대서특필 하였다 (정부 제안서 42쪽 ~ 43쪽 언급)

문세광이 일본의 조총련계로 1974년 광복절 식상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쏘려다가 실패하고 육여사를 쏘았다.
그래서 이후 1988년 금정구청 가정복지과장인 박재춘과장이 금청구청 개청식 날, 자신이 모셔 온 꽃선생(문00)이 꽃꽂이한 공금 30만원을 중간에서 잘라 먹은 것일까?
나의 이종언니들 중에서 문씨 집안에 시집 간 이종언니(김00)가 가장 먼저 죽었다(부산 부민 병원에서). 2008년, 65세도 넘기지 못하고.
또 나의 초등교 동기생 문영애에게 최근에 비만이 왔다.
요즈음 “공직자들은 인간을 도구를 쓰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경상도에서는 하수 도랑을 청소하는 것을 “도구 친다”고 했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저 무례한 망나니들은 두고만 볼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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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정열씨 ........ 나의 아저씨다. 아버지의 사촌동생이다.

* 동해........ 나의 친척 아저씨, 안동해씨에게 (젊은 나이에) 직장암이 와서 수술하고 항문을 밖으로 내었다. 나의 어머니(윤금동)가 직장암으로 진단 받기 이전이다.

☆ 어머니(윤금동) 의 당뇨 :
1984년 말~1985년 2월 (만 56세) - 제안자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졸업을 하던 해 (* 1983년 10월 아웅산 폭탄 사건 )

- 어머니 직장암 수술 : 1987년 (만 58세 )
- 2004년 3월 망 (만 75세)


-- 2011년 1월 29일, 글쓴이, 안정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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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은 어떤 해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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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은 박정희 정부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5.16 군사혁명을 일으켜
1963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헌정에 의하면 중임하더라도 70년도가 임기가 끝나고 1971년에는 정권을 물려주어야 하는 해였다.
그러나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고,
1970년 11. 13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72년 10월 7일 유신선포를 하였다.

1971년은 내가 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 3학년 때인데
나는 대학에 진학을 하기 위하여 책과의 전쟁을 하였다.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는 좋은 자리가 은행원인데 한국산업은행 외에는 시험으로 입사하는 은행이 없다고 들었으므로
1971년 3월, 3학년에는 진학반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 때의 사회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뜻있는 인사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혁명을 일으킨 것 자체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비평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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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안서 3쪽 ~ 8쪽, 이론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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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아버지는 아들과 딸 3형제를 낳았으나 나의 아버지 혼자만 살고
둘은 어려서 죽었다.
나의 할아버지(안금봉)는
아버지가 7살(1930년대 초 : 일제 감점기 )
상갓집(망자가 안00의 초상집)의 음식을 먹고 돌아가시었다.
이후 나의 할머니(박금수)는
나의 아버지(종갓집의 장손 =종손)가
고모와 삼촌에 섞여서 성장할 수가 있다고 하여
일찍 재혼(재혼한 재가 - 田씨 )해 가셨다. 할머니(박금수)의 생가도 본가와 멀지 않다. 금정구 관내이다.

요즈음 신문을 보니 1932년 4월에 윤봉길이
상하이 홍구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인을 죽였다고 했다.
그 날 그 장소가 일본 왕의 축하연.


-- 2012. 5. 5,(토), 어린이날, 글쓴이 : 안정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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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안정은 ( 제안자)

주 제 : 식품 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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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서 :
한국전통식품 및 전통양념(조미료) 제조와 유통에 따른 정부 규제에 관한 고찰과 그 발전방향 - 부산광역시를 중심으로(1999년 10월 20일, 김대중 정부)


제안자 :
부산광역시 금정구청 기획감사실 (실장 : 임병철 / 구청장 : 윤석천)
지방행정 주사, 안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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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오늘 3월 26일은 안중근 순국일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일본의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죽이고
이듬해인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
1910년 3월 26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이후 10년 후인 1919년 1. 21일에는 또 고종황제가 승하했다.
갑작스런 죽음으로 독살설이 퍼졌고 이것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 강점기 36년 동안 우리민족은 갖은 압박을 받았지만 해방이 되었다.
주위에서 살펴보면 윤씨 성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는 풍이라는 유전성이 있는 병이 있는가 하면 본태성 고혈압(이씨)이란 병도 있고 또 액취증, 언챙이도 있었다. 본태성 고혈압과 언챙이는 유전성의 병이라고 하나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 2013. 3. 26(화), 2013. 6. 8(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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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 10. 22일, 조선일보, 구태훈 성균관대 교수, 허얼삔의 총성
- 2009. 10. 23일, 한겨레, 노형석 기자, 서예, 안중근 특별전
- 2009. 10. 24, 조선일보, 전봉관 KAIST 교수,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
- 2009. 10. 26, 조선일보, 이위재 기자, 안중근의 후손이란 것에 긍지, 책임감 느껴
- 2009. 10. 27, 조선일보,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 안중근 영웅의 왕관을 손에 들고.....
- 2009. 11. 9,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다른 평화론의 차이 ?
- 2013. 6. 7(금), 조선일보,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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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안정은 (제안자)

제 목 : 식품안전 시기 상조인가 ?


태화가 뜸뜸이 보인다.
부산의 향토백화점인 이전의 태화백화점 ,
울산의 태화강
태화고무장갑 등등


1919. 1. 21,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황제가 승하했다. 갑작스런 죽음,
독살설은 전국으로 퍼졌고 이는 곧 3. 1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는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모였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들은 * 태화관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식(민족대표 29명 참석)을 가진 뒤 일제 당국에 자수하여 구금되었다.
3월 1일 탑골공원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며 시내를 행진했다. 시위운동은 전국에서 일어났으며 해외동포들도 참여했다.


--「한국사의 이해」, 송찬섭, 김남윤, 윤대원 공저, 한국통신대학교 출판부, 2008년 333쪽 --
-- 2009. 8. 15(토), 조선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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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화관 - 서울 종로 인사동 소재의 ‘태화관’ 이라는 음식점에서
하루 전인 2월 28일 저녁, 비밀리에 독립선언식(33인 중 29인 참석)을
가진 뒤 일제 당국에 자수하여 구금되었다. 즉 탑골공원에서는 불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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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지철과 차금봉 ]

박정희 정부시절 차지철은 박정희 대통령의 부하( 경호실장 ?, 비서실장? )였다. 1979년 10.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김재규의 총에 죽었다.

1919년 2. 8일 일본 동경(=도쿄)의 조선 YMCA 강단에서 일본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대한독립선언서를 채택했다 ( 2.8 독립선언)
민족자결주의와 파리 강화 회의에 고무된 이들은 여러차례 비밀회의를 거쳐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한 뒤 민족대회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이날 유학생 총회를 열고 독립선언식을 가졌던 것이다.
같은 무렵 나라 안에서도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나라 안팎에 독립을 선언하여 독립을 이루려는 움직임이 은밀히 진행되었다.
1919년 1월부터 천도교, 기독교, 불교 그리고 학생 대표들이 비밀리에 모임을 가지고 3.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과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약속했다. 3.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함께 하기로 한 민족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학생 등 시민들이 중심이 되었다.
-- (중간 줄임)--
1919. 3. 22일 철도 기관수 차금봉은
잡역 노동자와 부근의 전차차장, 공장 직공 등 700 ~800여명을 이끌고
만리동에서 독립문까지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그는 27일에도 만철 경성관리국 조선인 노동자의 시위를 조직하고 서울역 앞에서 조선노동대회 조선독립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내걸고 파업시위를 주도했다.

-- ( 이하 줄임)

-- 한국사의 이해, 송찬섭, 김남윤, 윤대원 공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2008년 333쪽 ~33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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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북, “ 천안함 사건은 우리와 무관하다 ”


北, 2년전에도 美.中 정상회담 직전 대화 시늉

날짜와 장소까지 합의했던 남북 당국 회담이 2013. 6. 11일 무산되었다.
2011년 2월의 남북 고위급 군사 실무회담 당시가 재연(再演)된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은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11월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 등으로 대남 도발 수위를 한껏 높여오다 이듬해 1월 5일 ‘공화국 정부, 정당, 단체 연합성명’을 시작으로 ‘무조건 대화’ 공세를 펼쳤다. 미국, 중국 정상 회담이 코앞 (2011년 1월 20일)에 있던 시점이다.
우리 정부는 천안함, 연평도 사건에 대한 ‘진실의 순간을 확인하기 위해’
남북 고위급 군사회담을 위한 실무회담을 역 제의해 2011년 2월 8~9일 판문점에서 회담이 성사되었다.
하지만 북측 수석 대표로 나온 리선권 대좌는 회담 마지막 날,
천안함 사건은 우리(북)와 무관하다 , (천안함은) 특대형 모략극 ,
남측이 연평도를 도발의 근거지로 만들었다 등의 말을 쏟아낸 뒤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북한은 이번에도 핵실험과 개성공단 폐쇄 등으로 긴장 수위를 높여 오다
미국, 중국 정상회담 (2013년 7일 ~8일)을 하루 앞둔 2013년 6월 6일, 남측에 전격적으로 대화를 제의했다. 하지만 5일만에 남측 수석대표의 격을 문제 삼아 회담을 무산시켰다.

-- 2013. 6. 12, 수요일, 조선일보, 황대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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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함 폭침 ............. 천안함은 2010. 3. 26일 백령도 인근 해역에서 초계 작전 중 침몰해 승조원 46명이 사망했다. 정부는 북한의 책임을 물어 대북 경협과 남북 교류를 전면 중단하는 5. 24 조치를 취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특대형 모략극이다 , 천안함은 좌초했다 고 주장해 왔다. (동아일보, 2013. 8. 8일, 조승호, 김성모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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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안정은 (제안자)

제 목 : 중국 하얼빈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중국 하얼빈驛(역)에
2014년 1월 19일, 안의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들어섰다.
중국 하얼빈시와 하얼빈시 철도국은 이 공사를 그동안 비밀에 붙여진채
진행이 되었으며
이날 기념관의 개관식에는 헤이룽장성 부성장을 비롯한 중국측 인사들만
참석했다.
규모는 231㎡ (70평)으로 하얼빈역 귀빈실 내에 위치해 있으며 건물 내부에
안의사의 의거 현장을 조망할 수 잇도록 조성되었다.
그동안 간단한 표식만 있던 안의사의 저격 현장에 ‘ 안의사 이등박문 격살사건 발생지, 1909년 10월 26일’ 라는 설명 문구를 눈에 잘 띄게 걸어 놓았다.
기념관의 글은 한. 중 양국어로 전시되었으며 기념관에 걸린 벽시계는
안의사의 의거 시각인 오전 9시 30분에 고정되어 있다.

-- 조선일보, 2014. 1. 20일(월), 안용현, 김진명 기자 --
-- 국제신문, 2014. 1. 20일(월), 정유선 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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