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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만리장성은 넘어도.....

작성자
안 * * *



작성자 : 안정은 (제안자)

주 제 : 식품 안전

제 목 : 민주투사 김영삼씨 시민공원에 조각기념비 세워야


한국의 정부는 정부다워야 한다.
제안자는 경제에는 문외한이지만 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경제계에 간섭하기에는 한국의 기업은 너무 컸다. 그 의미는 기업은 기업들에 맡겨 놓아야 한다는 의미와 유사하다. 그것은 또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이다. 한국의 식품이 불안했던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먹을 거리를 기업들에 맡겨 놓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제안서대로 이행해야 한다. 제안서의 내용은 식품의 규제에만 있지 않고 식품의 생산도 포함이 되는데 정부에서는 당장 빅딜로 생산해야 할 식품의 생산에서 전혀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야 기존의 식품생산 기업들이 어느 세월에 다른 업으로 전환할 것인가. 그러하니 그 기업들이 여태껏 만들고 있는 식품들이 좋을 리가 만무이며 식품전문가들이 말하는 대로 쓰레기 식품들인 것이다.
국민들은 많이 불편해도 정부식품을 택배로 받아서 먹고
삼식은 공영의 농산물 도매시장(농산물 검사소가 있다)의 채소 및 부식을 사서 손수 조리해서 먹어야 한다. 학교 단체급식소, 산업체 급식소, 병원의 단체 급식소, 어린이집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박정희 정부가 무너지고 김영삼 정부에서는 경제기획원을 없앴는데 경제기획원은 박정희 정부에서 잘살아 보자는 뜻 즉 경제 살리기에 정부가 나서기 위해서 설치한 정부 기구로 나쁘게 말하면 정경유착으로 설립된 정부 기구이므로 그 즈음 없어진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제안자가 적지 않은 제안건의서를 제출하면서 경제기획원이 없어진 것이 문제가 되었다면 수차례 언급했을 터이다. 그러나 제안자는 그리한 적이 없었다.
경제기획원을 없애거나 새마을기를 내리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할 일이었다.
제안자는 한국사회의 문제는 잘 살아 보자는 등 돈의 문제보다도 국민의 건강 보전(즉 보건) 문제가 더 크다고 보고 있다. 현재 북의 사태도 마찬가지다. 즉 질병을 방치한 결과 의료 부문이 너무 커 세간에서는 세칭 치약(약으로 나라를 다스린다) 및 치질(질병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라는 말이 나왔던 것이다. 제안자 아버지의 경우도 당장 그러했으며 약사가 정부 식품을 판매할 동식품 판매소보다 많다고 언급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의사들은 기존의 질병을 가지고 오는 환자, 그리고 성형 등 새로운 환자들에 이제는 지쳐 있다. 인간에게는 돈이란 적절히 있으면 되며 인간을 다소 편하게 할 뿐이란 말은 1980년대부터 있었다. 공수래 공수거, 빈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이 인간이므로 그러하다.
그러나 그러한 과거의 잘못이 직업 공무원에게 있었다고
단체장 선거에 정당을 들이고
그리고 박봉으로 살아온 공무원의 공무원 연금법을 공무원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과도하게 손질하면서 대통령 연금법은 그대로 둔데다
김대중 대통령은 피를 흘린 모범의 여성 공무원이 제출한 제안서를 헌신짝처럼 처리하며 접수증도 주지를 않았다. 주위의 김씨들 중 김해김씨들에게 피해가 많은 것은 그것이 아닌가 ? 김영삼 대통령이 중앙 및 지방 정부의 수장을 정당이 공천토록 했고 한나라당에는 김해김씨라는 김무성 의원이 ‘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 라고 표현만 해도 공분할 국민들이 많은 한국의 풍토에서 정치인으로서 박근혜씨의 호위병으로 자처해 오늘의 정치국면을 초래했다. 오늘의 국정에서 김씨들이 같이 뭉치지 않겠다면 간판에 김씨들은 본을 달리 표기해도 좋다 (안가의 원 조상은 이씨로 이씨의 조상은 중국에서 왔다고 들었다 )
그러나 국정에서는 뭉쳐 주어야 한다. 주위에는 김씨의 여성들이 적지 않지만 단 1명만 정부 식품을 먹는 듯했다.
그리고 북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후 김일성을 만나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북과의 문제에 김씨들이 나서야 하는데도 아무도 나서지 않는데 그것은 북의 주민들이 굶주린다는 탈북민들의 증언이 모두 거짓말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 그렇다면 북한 주민을 돕자는 한두달전의 제안자는 넌센스인 것이다. 맞는가 ? 북의 문제라고 원수인 대통령에만 맡겨 놓아서야 어느 천년에 남북 통일이 될 것인가 !
김이박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국회에 있는 김씨의원들은 앞장 서라 !
그리고 식품안전 기금을 거두어서 식품안전의 국정을 실행해야 한다고 책임자에 건의를 해야 한다.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아닌가.
국민들이 추운 겨울, 거리에서 촛불을 들기 전에.... 안철수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께 다가오는 선거를 앞두고 기초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정당공천을 없애자고 건의를 하니 ‘ 정치권에서 알아서 할 일’ 이라고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유기했다. 그래서 명석하기 그지없는 한국의 국회에서 탄핵이 된 것이 아닌가 ?
한국의 식품안전의 국정 추진은 현재에도 너무 불안해서 한국의 사법부가 박근혜 대통령의 건강(즉 먹거리)을 위해서 감옥에서 가두고 보호 조치하고 있는지, 진정 죄가 있어서 그런지 의심스럽다.
웬만한 전직 대통령들은 죽었다나 말았다나 ? 죽었다는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이야 생전 밤낮없이 일한 제안 추진을 ‘ 인공호흡 타령’ 을 했으니 대통령의 연금으로 주위의 의사와 함께 화려한 임종을 맞을 수 있겠지만 제안자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수고꼭지처럼 마르지 않아서.....
분향소에는
막내 동생의 시어른 (안동에서 살아온 양반, 권씨로 양부모를 96세 97세까지 모신 전직 세무직 공무원)은 먼 경북 안동에서 부산의 아버지의 분향소에까지 와서 아버지의 혼을 달래 주었다. 애고.... 애고... 애고 .....애고......
어찌 양반들은 아는 설움을 김씨들은 모를까 ?
그래서 만리장성은 넘어도 양반과 상놈의 성은 넘지를 못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니었나

첨 부 : 해방 후 정부사의 이해 (理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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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2. 18(일) --

등록 : 2018. 2. 18(일)
제안청 부산시청 - 부산민원 120 -시민참여, 시민게시판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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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 부 ==========

작성자 : 안정은 (제안자 - 행정학과 박사과정 수료 / 영양사 )

주 제 : 식품 안전 (Safe foo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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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서 :
한국전통식품 및 전통양념(조미료) 제조와 유통에 따른 정부 규제에 관한 고찰과 그 발전방향 - 부산광역시를 중심으로(1999년 10월 20일, 김대중 정부)


제안자 :
부산광역시 금정구청 기획감사실,
지방행정 주사(6급) 안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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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해방 후 정부사의 이해 (理解)

( 중간 줄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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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 ( 임기 5년 : 1993년 3월 ∼ 1998년 2월 )
( 1992. 12. 19일,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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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민정부,
- 신한국 창조, 역사 바로 세우기
- 정경유착의 기구였던 경제 기획원 없앰


가)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 (조순 부총리)
- 발표 : 1993년 8. 12, 저녁 7시 뉴스 전격 발표


나) 한시적(5년간) 농어촌특별세의 징수 : ‘ 양여금 및 농어촌특별세 관련 국세의 세입처리 지침, 1996년 1월, 재정경제원’ 에 의거 1996년 1월 1일부터
시행 ( ※ 지방교육양여금 =지방 교육세 )
0. 중앙정부에 세정개혁위원회를 설치하여 교육세의 징수체계를 개선
[ 제안자 : 부산 금정구청 세무과 징수계. 통계 담당자, 지방행정주사 안정은 / 제안서 : 지방세에 부과된 교육세 영수필 통지서 송부제도 고려 방안 (1994년 7월 3일), 지방세에 부과된 교육세 징수 방안 개선 (1995. 10. 25일, 1996년 5. 29일) ] 하면서 한시적인 농어촌특별세를 징수함


나 -1 ) 각시도청 및 시군구청 세무부서에 근무하는 공무원을 세무직으로
전문직렬화하여 행정직과 구분하여 임용해서 채용단계에서부터 전문화

나-2 ) 지방세 공과금 수납부 개선 : 공과금 수납 창구를 없애고 공과금 수납기기를 부산시 금고인 부산은행에 설치하여 지방세를 자동수납기기에서 수납하도록 기계화 함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에서 시행하고 이를 시행하는 은행도 늘어났으며 지방세뿐만 아니라 국세 고지서, 신문대금, 과태료 등 수납서의 종류도 불어났음 ) - * 제안서의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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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안서 : 정기분 개인균등할 주민세 부과, 고지 발급제도 개선, 1996년 8월 6일 안상영 부산시장 제출 / 제안자 : 부산 금정구 노포동 사무소 사무장, 6급, 안정은


다 ) 공직자 재산 등록
(* 재산공개는 아니다 - 부산시 공무원들의 경우)
- 세무부서 또는 재무부서에 근무하는 공무원에 한해 재산 현황을 기획감사실에 제출토록 하고 매해 재산의 증감 등 변동 사항도 제출한다.

다-1 ) 공무원의 연가 보장. 여성 공무원의 출산 휴가 연장
0. 연가(공무원들이 1년 동안 쉴 수 있는 날) 보장이란
지정된 연가일수를 모두 쉬지 않으면 그 일수에 해당되는 만큼 돈으로 환급해 줌(돈을 공무원에게 내어 줌)

다-2) 공무원 연금 개혁 (방향 - 연금 지급액의 축소)
- 연금대상자를 줄임 : 예시 (서울신문사에 근무하는 구성원들은 공무원 연금 대상자에서 제외 )
- 공무원이 퇴직 후 재혼한 배우자에게는 공무원의 유족 연금대상에서 제외
- 신규로 채용되는 공무원에게는 공무원 연금 수령 개시 연령을 ‘ 근무 후 20년 후 퇴직 시’ 에서 더 연장함


라)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사회복지공동 모금회로 전환 (기부금 창구를 관청에서 민간으로 이관, 그리하여 기부금액은 증액되었으나 기부금의 효율적인 분배가 숙제로 남아 있음 )

라 -1 ) 생활보호법을 생활수급법으로 전환하여 생활보호대상자를 확대하고,
이전(以前) 주소가 없이 병원에 입원해 있던 행려환자에게는 주민등록번호대신 행려환자 번호(=의료보호수첩에서 주민등록번호로 대신하여 활용)를 부여하여 보호조치

라 -2) 65세 이상 어르신에 모두에 교통비 지급 - 중앙정부에서 개별 어르신의 통장에 매달 입금

라 -3) 국민의료보험과 영세서민의 의료보호 및 의료부조 제도를 통합


마) 민선 지방자치의 실시
0. 민선단체장 제도 시행 (시도지사, 시군구 구청장 민선)
0. 중앙 공무원을 각시도청의 고위 공무원으로 발령하는 낙하산 인사가 금지되어 지방직 공무원의 진급(계급이 올라감)이 빨라지는 효과를 거둠


바) 대학입시 제도, 당해연도에서 입시 기회를 확대 - 한해 입시 시험을 두번 보아서 선택하여 입학 (수시 입학, 정시 입학)
( ※ 예전에는 전기 입시 시험 대학과 후기 입시 시험 대학이 나누어졌음)

바 -1 ) 대학원 문호 개방 : 평생 교육의 이념
- 대학원 입학시험에서 영어 및 제2외국어, 필기시험으로 입학하던 것을 제 2외국어(보통 독어 또는 불어)를 없애는 등 입학의 조건을 점차 완화함

바 -2 ) 학교 단체급식의 실시를 본격화 : 학교 단체 급식의 실시를 위하여 학교 급식 운영위원회를 구성토록 하여 본격적으로 실시 (김숙희 교육부 장관 : 영양사 )

바 -3 ) 중고등학교 남녀공학화 : 중고등학교를 사범대학 부속 중교교처럼 남녀 공학화 (제안 : 전인교육을 위한 제안, 1997. 1. 23일 제출, 세계화추진기획단 접수 → 교육부 이첩 (초등부)/ 제안 내용 및 제안자 : 전인교육, 독서교육, 회의 진행법, 교육평가, 남녀 공학 - 부산 금정구청 총무과 6급 안정은)

사) 환경부 신설 및 쓰레기 종량제 실시 (황산성 환경부장관)


자) 단체급식소의 자율배식 (부산시청, 부산시 공무원 교육원, 부산시 경찰청, 부산지방법원, 중앙공무원교육원, 부산대학교 대학생활원 )
[ 제안서 : 음식점 및 단체급식의 현실태와 그 개선 방안 - 단체급식의 배식방법에 따른 식품의 안전성을 중심으로, 문정수 부산시장, 1996년 4. 19일 제출 / 제안자 : 부산시 시민제안으로 응모 (부산시 금정구청 사회과 의료보장계장, 6급 안정은 ]

자-1 ) 식품의약품관리청 설립 발표 - 부산일보 (1996년 4. 19일자)
(※ 시행 및 개청은 1998년 3월, 김대중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실시하였으며 초대청장은 박종세씨 )

차) 개인정보 보호
- 주소 이동시, 주민등록 전출신고 줄임(=통반장 경유 제도 줄임),
- 새주소 (=도로명 주소 체계)사업 준비

타) 행정 정보 공개 청구 제도 도입

파) 세무관련 업무 및 보고서의 컴퓨터화 (= 전산화)
0. 지방청에서는 구청의 ‘지방교육세 징수보고서’ (국세 보고서 - 중앙정부에 보고 )가 먼저 전산화
※ 중앙정부에 세정개혁위원회를 설치하여 지방세에 부가되어 징수하던 교육세의 징수체계를 개선 (제안자 : 부산 금정구청 세무과 징수계. 통계 담당자, 지방행정주사 안정은)하면서 동시에 한시적인 농어민특별세를 징수함

하) 군개혁 : 문민정부의 이념 ( 군정 종식 )
- 군내의 비선조직인 하나회(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내 장교들의 모임 - 私組織 )를 해산시킴.

하 -1 ) 대북 외교
- 대통령으로 취임 후 김일성(북한의 우두머리)을 만나자고 제안한 후, 곧 북의 김일성이 사망
- 북과의 통일에 앞서 북한의 경제가 발전해야 한다 (김영삼 대통령)

하-2 ) 일제의 잔재물로 서울에 남아 있었던 조선 총독부 건물을 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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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대통령
- 1927년 12월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출생

0. 본은 김녕 김씨 : 거제도는 유배지로 알려져 있으나 김녕 김씨가 언제 거제도에 정착했는지는 알 수 없음.
- 윗대 김녕 김씨 중 한분이 조선 세조때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순절

0. 조부 : 김동옥, 조모 : 박임선(任先)
- 생계의 원천은 어장

0. 부친 : 김홍조(洪祚), 모친 : 박부련(富連) 의 맏아들
* 아래 딸 다섯 - 즉 아들로서는 유일한 아들
* 생계 : 어장 - 경남 마산 합포구에 아버지의 멸치어장이 있었음

0. 영부인 : 손 명순(命順) - 아들 하나로 자란 김영삼 대학생은 1951년
이화여대 약학과 재학 중이던 손명순(마산에서 ‘경향고무’ 라는 고무신 공장을 하던 손상호씨의 맏딸) 여사와 맞선을 보고 1951년 초 약혼하고, 동년 3월 6일 대학교 당국 몰래(학칙은 재학 중 결혼 금지)결혼(동갑내기 23살) →
동년 9월 김영삼 대학생은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철학과를 졸업
* 중매인 : 마산 학산병원장 이(李)원장

- 손명순 여사는 1952년 이화여대 약학과 졸업


0. 성장
- 장목 소학교 : 초등학교가 거주지인 외포리와 40여리 떨어져 있어 재학시 하숙생활 ( * 장목 소학교 고학년에서 조선어가 시간표에서 사라지고 조선어 사용 금지령이 내리고 이어 창씨 개명령이 내려졌다 )

- 통영 중학교 입학 (1943년) : 동래중학교에 응시했으나 낙방 → 장승포에 소재한 심상소학교를 다니며 재수 → 통영중학교에 입학 (일본인 학생 40명. 한국인 학생 20명), 교장이 일본인이였으며 이후 진해여중으로 전근을 갔다. 교장의 이삿짐에는 설탕 한포대가 있었다. 당시 담임도 일본인.
- (* 1945년 8. 15일 해방 : 일본 왕 쇼와 (昭和)의 항복 발표 ) -
해방으로 인해 부산의 명문이던 경남중학에 다니던 반수이상의 학생들이 본국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경남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교우(한국인)와 절친하고 이후 친구들은 야당생활의 어려움에서 힘이 되어 주었다.
해방 후 한국이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로 나아갈 것이라 보고 하숙방에 ‘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 ’ 이라는 글을 붓글씨로 써서 벽에 붙여 놓았다.
※ 경남 중학교 교장은 안용백씨 (일본 경성제대 철학과)는 수업에서 공민 즉 윤리를 가르쳤으며 김영삼 대통령이 서울대 철학과에 진로를 선택하게 한 것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학생활로 다시 하숙생활을 하다.
- 명문고, 경남 고등학교로 진학

0. 대학, 군 생활 : 서울대 문리과 재학 중, 학도 의용군으로 입대 (군번 : E134 )


※ 사람들은 김구 선생과 이승만 박사를 곧잘 비교하곤 하는데
나는 당시 김구 선생보다는 이승만 박사를 더 평가하고 있었다.
국민정서도 그랬다고 본다. 나는 서울운동장에서 이승만 박사의 연설을 직접 들어 본 일이 있다. 이박사가 대통령이 되기 전이였는데 이박사의 연설에 대한 군중들의 호응은 대단했다. 나중에 이박사는 장기집권을 위한 부정선거로 독재자가 되어버렸지만 해방이후 상당기간 동안 그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심은 대단히 컸다. 국회에서 대통령 선거를 할 때도 이박사가 압도적이었다.
1949년 6. 26일 김구 선생이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피살되었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생전에 김구 선생을 한번도 뵌 적은 없었지만 선생의 서거 소식을 듣자 마자 친구들과 함께 경교장으로 달려갔다. (김영삼 회고록 제 1권 70쪽, 71쪽) - (이하 줄임)

※ 대학에서 재학 중 창랑선생(장택상씨 : 국회 부의장 → 국무총리)의 비서가 되어 정치인(만26세 : 1954년, 제3대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으로서 나가는 발판이 되다.

- 첫 국회의원 : 고향 거제군을 지역구로 하여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서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다 (1954년)

- 이후 제4대 국회의원은 1958년 민주당( 자유당 →민주당)으로 ‘ 부산시 서구 갑구’ 를 지역구로 해서 출마했으나 낙선, 자유당 이상룡 후보가 당선함으로써 국회의원 생활에서 유일한 낙선이 되었다.
( * 자유당 탈당 : 1954년 11. 27일 초대 대통령 연임제한 철폐 개헌, 일명 사사오입개헌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반대하며 자유당에서 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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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 1958년 제 4대 국회의원 선거(지역구 : 부산 서구 갑구)에서
김영삼 의원님은 “ 내가 7대3의 비율로 앞서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머지 투표함을 열자 나의 지지표가 투표함 1개당 7표, 심지어는 3표나 2표밖에 안나오는 ‘해괴망측한 이변’ 이 일어났다. 그 결과 이상룡 후보가 2만 2,131표, 내가 1만 8,858표 - (중간 줄임) - 자유당 이상룡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러한 환표 부정사건은 나의 4대 국회 진출의 길을 봉쇄했을뿐만 아니라 나의 국회의원 생활가운데 유일한 ‘낙선’ 기록을 남겼다. ( - 김영삼 회고록, 제1권 131쪽 )


참고 문헌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백산서당 / 서울), 2000년 1쪽 ∼153쪽.

-- 2015. 11. 26(목), 김영삼 대통령 국가장일, 제안자 기록 --
-- 2015. 11. 27(금), 내용 보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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