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절구는 중국으로 떠나기로 작정을 하고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는 길에 쓴 시다. 이 앞서 글에는 러일전쟁이 일어나 조정에서는 일본파의 수중으로 들어가 대대적으로 일본이 이기고 러시아가 패했다는 전쟁 보도가 있었던 반면 선생의 주변인들의 해석이 가지각색이여서 러시아에 가까운 지인들은 이를 허구라고 하였고, 이러는 와중에 천하의 대세를 통찰하고자 바다 건너 서쪽을 유람하고자 하였다고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은 바로 서울에서 인천 오는 길에 쓴 글이다. 기차라고 하는 신문물을 보고서 기차가 얼마나 빠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한자로 날비자(飛)를 쓰고 있으며, 당시 지식인들의 습관에 대해 통렬히 비판하고 있음을 본다. 서울과 인천의 거리를 팔십 리로 쓰고 있는 것이며, 재물을 사람의 혈맥이며, 항구를 나라의 목구멍이라고 말한 비유며, 나라를 빼앗긴 자성의 발견이 돋보이는 시문이다
2. 인천에서 배를 기다리며(1905년 운인 송홍 나이 34세)
仁川候船(인천후선) 인천에서 배를 기다리다
候船三夜宿仁川(후선삼야숙인천) 배를 기다려 사흘 밤 인천에서 묵으니
明月東天滅舊圓(명월동천멸구원) 동쪽 하는 밝은 달이 조금 이지러졌네
知是戰時譏詗甚(지시전시기형심) 전시에 기찰 심한 줄 알겠으니
幾時關吏到門前(기시관리도문전) 언제 관리가 문전에 당도하려나
이 글은 많은 기대감을 가지고 당시의 중국으로 떠나는 배를 타기 위해 사흘 밤을 세웠다는 것이며 전쟁 중이기 때문에 검문검색이 심할 줄 알지만 늑장 부리는 관리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 있다. 마치 코로나 시국에 우리들이 인천공항에서 다른 나라로 출국하는 그 심회를 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