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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이상필(李相弼 : 1890∼1932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062
이상필은 강화 하점면 망월리 출신이다. 일찍부터 우리 나라 고유의 전통 무술인 태권도를 연마하여 용맹이 뛰어났으며, 선원면 찬우물에서 개최한 군민체육대회에서 단거리 경주 우승을 독차지하는 명선수이기도 했다. 그는 나라가 기울자 망명길을 떠났는데, 해방 후 정부 수립과 함께 부통령이 된 이시영(李始榮) 선생과 동행하였다. 어린 나이에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독립군 중대장으로 항일투쟁전선에 앞장서 나갔으며 임시정부 요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만주 통화현(通化縣)에 있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한편으로 독립군 중대장 직무에 충실하였다. 이 때의 신흥무관학교에는 초대 학장이 이시영 선생, 교장이 이흡(李洽 : 일명 天民), 부교장이 양규열(梁圭烈), 교성대장(敎成隊長)에 이청천(李靑天), 교관에 오광선(吳光善), 이범석(李範奭) 등이었는데 그들은 저 유명한 청산리(靑山里) 싸움에서 대승하였고, 약간의 내분이 없지 않았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3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 후 임시정부의 지령에 의하여 1919년 적의 기관(機關) 파괴, 주구(走狗) 토벌, 군자(軍資) 모집 등의 임무를 띠고 밀입국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재차 입국하였다가 신의주(新義州) 근교에서 불운하게 일경에 포박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며 1년 간 옥고를 치렀다. 1921년에도 삼엄한 일제의 경비망을 뚫고 군자금 모금 차 밀입국하였다가 소정의 임무를 마치고 동아일보 기자증을 마련하여 출국하려다 역시 운 나쁘게 감시망에 걸려 구금되고 실신할 만큼 고문을 당하고 나와서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감시를 당하며 살아가야 했다.
그리하여 장인이 경영하는 양도면 흥천학교(興天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 교육에 힘썼으며, 항상 학생들에게 항일사상을 주입시키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32년 일제에 의한 간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42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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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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