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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회보

7월의 독립운동가 김승학(金承學)선생(1881. 7. 12∼1964. 12. 17)

담당부서
자치지원과 (032-440-2430)
작성일
2003-09-29
조회수
1051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김승학 선생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습니다.

1881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조병준의 문하에서 경학을 수학하면서 척사적 민족주의를 수용하였습니다. 이후 한성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근대적 신학문을 수학하면서 척사적 토대 위에서 근대적 민족주의를 접목시켰습니다.

때문에 한말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자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한말 최대의 국권회복운동단체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비현 면감으로 활동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갔던 것입니다.

특히 안중근 의거 직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가중되자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910년 10월 단신으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한 것은 그같은 결심의 발현이었습니다. 나아가 항일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1912년 동삼성 강무당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았습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서간도에서 곧 바로 조직된 대한독립단에 가담하여 재무부장을 맡은 것은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이어 대한독립단과 임시정부 평안북도 독판부 특파원으로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 하였습니다.
평안도 52개 지역에 임시정부 연통제 기관과 대한독립단 지단을 설치하여 국내외 연계투쟁망을 조직하였고, 또 독립운동 자금 모집망을 구축하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직망과 자금줄이 바로 서간도 독립군 단체들의 국내 진공작전 루트이자 생명선이었습니다.

1920년 1월 서간도로 귀환해서는 독립군 단체의 통합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서간도 지역 독립군 단체들을 임정 산하의 광복군사령부와 광복군참리부로 묶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상해에서 구입해 가져온 무기는 이들 광복군사령부 휘하 독립군 부대 무장투쟁의 원동력이었습니다.

1921년 3월 다시 상해로 간 뒤에는 정간 상태의 {독립신문}을 복간하여 독립운동을 국내외에 선전하였습니다. 또 한중호조사의 선전부장으로 한중 양민의 우호 증진과 항일 연대투쟁의 저변확대에도 노력하여 갔습니다. 특히 1924년부터는 임시의정원 의원, 학무총장 대리로 활동하면서 침체의 늪에 빠진 임정을 지켜 나갔습니다.

1926년 10월에는 참의부 참의장으로 임명되어 3부 통합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29년 11월 통합회의를 마치고 귀대하다가 일경에 피체된 뒤, 국내로 압송되어 1935년 4월까지 평양형무소에서 5년여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후 다시 만주로 망명한 뒤, 북경을 근거지로 임시정부의 만주 연락책으로 활동하면서 청년들을 선발하여 임정으로 보내는 등의 역할을 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습니다. 광복 후에는 주로 독립운동사 편찬 사업에 매진하여 초기 독립운동사의 체계를 정립하고 민족정기를 선양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7월 한 달간 전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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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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