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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회보

8월의 독립운동가 정 정 화(鄭靖和) 선생

담당부서
자치지원과 (032-440-2430)
작성일
2003-09-29
조회수
1066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정정화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습니다.

1900년 서울에서 태어난 선생은 유복한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깨너머로 한학을 수학하였다. 11살 때 한말 개화파 대신 김가진의 아들인 김의한과 혼인한 뒤, 그의 영향으로 근대적 사회의식과 민족의식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특히 3·1운동과 그 과정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비밀결사 대동단 총재였던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의 상해 망명은 생애의 한 전기를 이루었다. 이를 계기로 상해 망명과 독립운동 참여를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1920년 1월 상해로 망명한 이후 1931년까지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6차례나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였다.
주된 활동은 공식·비공식적인 독립운동 자금 조달 임무였고, 이 와중에서 일경에 피체되어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1931년 초 일곱 번째 상해로 망명한 이후 일제의 패망으로 1946년 환국할 때까지 주로 임정의 안주인 노릇을 하였다. 임정 요인들 가운데 선생의 밥을 먹지 않은 분이 없고, 임정의 가재도구 가운데 선생의 손때가 묻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뒷바라지에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독립운동 단체인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 등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임시정부 사수와 지지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특히 1943년에는 임시정부의 좌우통합 활동에 부응하여 여성차원의 민족통일전선인 한국애국부인회를 다시 세웠습니다.

나아가 한국애국부인회 훈련부 주임으로 활약하면서 중경에 있던 여러 독립운동 단체와 합동으로 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리하여 종전 이후 한국에 대한 국제공동관리설에 대항하여 한국 민족의 완전독립과 자주적 통일 민족국가 수립을 주장하였습니다.

1946년 5월 환국 이후에는 일체의 정치 활동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김구와 한국독립당의 신국가 건설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이후 감찰위원회 감찰위원으로 추천되었지만 사양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8월 한 달간 전시할 예정이다. 또한 극단 독립극장에서는 국가보훈처, 서울시 등의 후원으로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치마』를 8월 29일부터 9월 6일 까지 공연할 계획입니다.


자료제공 :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3704-9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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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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