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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회보

『12월의 문화인물』송만갑(宋萬甲) 판소리 명창

담당부서
자치지원과 (032-440-2430)
작성일
2003-09-30
조회수
1117
송만갑(宋萬甲 : 1865∼1939) : 조선말 판소리 명창, 독자적인 창법으로 판소리 예술의 신경지를 개척, 조선성악연구회를 설립하여 판소리와 창극발전에 기여.

송만갑은 조선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약한 최고의 판소리 명창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조선 후기의 판소리 가왕(歌王) 송흥록(宋興祿)의 후예로 송광록(宋光祿)-송우룡(宋雨龍, 본명: 又用) 등 동편제 소리를 부르던 가문(家門)에서 태어나 집안의 소리 맥을 이어가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소리 세계를 다지는 과정에서 '청중과 교감할 수 있는 소리가 진정한 예술'이라는 자각을 하고, 과감히 가문의 소리 전통을 벗어났다.

소리의 예맥을 '법통(法統)'이라 여기는 풍토에서 송만갑의 결단은 대단한 파문을 일으켰다. 집안에서는 물론 동편제 소리를 중시하는 선후배, 동료 소리꾼들 사이에서 '패려자식'으로까지 지탄을 받았으나, 송만갑은 그런 이견을 대할 때마다 '전방 보는 사람이 어찌 모본단만 가지고 장사를 하겠느냐'는 말로 자신의 소리 입지를 밝힌 것으로 유명하다. 이 말 뜻은 '옷감 가게에 온 사람이 비단을 원하면 비단을 팔고, 무명을 원하면 무명을 팔 듯이 청중이 원하는 소리를 자유롭게 불러 그들과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송만갑의 이런 주장은 20대부터 전국을 주유하며 다양한 청중을 만난 경험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송만갑은 소리예술로 일가를 이룰 시기인 30대 후반에 서울에서 공연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 무렵 외국 문물의 유입으로 모든 것이 놀랍게 변화해 가는 시대 정황과 공연문화를 맞닥뜨리면서 얻게된 '소리꾼의 통찰'일수도 있을 것이다.

마침내 송만갑은 국가의 지존인 황제에서부터 극장에 모인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청중의 '눈높이'에 맞는 소리를 불러 '시대의 최고 명창'이 되었다. 당시의 신문 기사에 따르면 '전라도에서는 송만갑이 아니면 판소리 명창이 아닌 줄 알 정도'로 인기를 누렸고, 어디서든 공연이 끝나면 '송만갑 소리 다시 한번 들읍시다'라는 환성이 그치질 않았다. 그 이유는 송만갑이 타고난 목을 지닌 데다 누구와 비견될 수 없는 소리 역량과 창법을 구사했기 때문이었다.

50대부터 작고하기 몇 년 전인 70대에 이르기까지 주로 노년기의 소리가 담긴 유성기 음반에는 그가 즐겨 부른 단가 진국명산과 남도민요 농부가를 비롯해 춘향가, 적벽가, 흥보가, 수궁가, 심청가 등 판소리 다섯 마당이 망라되어 있는데, 이미 노년에 이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음반에 담긴 소리들은 연륜을 더할수록 더욱 완성도 높은 예술세계를 들려주어 지칠 줄 모르는 예술 혼을 느끼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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