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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회보

6월의 독립운동가} 민종식(閔宗植) 선생

담당부서
자치지원과 (032-440-2340)
작성일
2003-10-04
조회수
2042
6월의 독립운동가} 민종식(閔宗植) 선생

(1861. 3∼1917. 6. 26)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민종식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861년 3월 경기도 여주에서 명성황후 일가로 태어난 선생은 약관 20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이조참판으로 승진하고 정부 내 여러 요직을 역임하는 등 탄탄대로의 관료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이 자행되고 그 와중에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치욕적인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관직을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충청도 정산으로 낙향하여 국치를 설욕하고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 부심하였다.
특히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국망의 위기가 닥쳐오자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다. 우선 을사 5적과 이토오를 비롯한 일제 침략자들을 처단하자는 상소를 올리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무장투쟁을 통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 국권회복을 달성하려고 의병 봉기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3월 충청도 정산에서 안병찬 등 유생들과 함께 600여명의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봉기의 첫 기치를 올렸다.
첫 봉기 후 홍주성을 쳤으나 실패하고 공주관아를 공격하기 위해 진격하던 중 충청도 합천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이후 처남 이용규 등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1906년 5월 충청도 홍산에서 재봉기하면서 의병대장에 추대 되었다.
이어 의병부대를 이끌고 서천읍·남포읍성 등을 장악한 뒤, 5월 19일 홍주 장날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1천여 명에 달하는 의병부대는 화포를 앞세워 홍주성의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였고, 드디어 홍주성 탈환이라는 큰 전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홍주성에 입성한 뒤 의병부대는 인근의 지방 유생들과 주민들의 헌신적인 지원을 받으며 10여 일간 일본군과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5월 31일 새벽, 결국 홍주성을 내어주었다.
이후에도 정산 일대에서 의병을 모으고 예산에 거주하던 처남 이남규의 도움을 받아 재차 의병 봉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던 중 1906년 11월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이남규 등이 피체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공주로 피신해 있다가 11월 20일 붙잡히고 말았다.
1907년 7월 교수형을 받았지만 종신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가 그해 12월 융희황제의 즉위 기념 특사로 풀려났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의기를 꺾지 않다가 1917년 6월 26일, 56세로 일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6월 한 달간 전시하고, 순국선열 유족회에서는 서대문 독립공원 독립관에서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는 학술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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