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반상회보

{7월의 호국인물} 박두원 공군 대위

담당부서
국방부 기획조정관실 (--)
작성일
2003-10-05
조회수
1403
{7월의 호국인물} 박두원 공군 대위 (1926. 7. 5 ∼ 1952. 8. 2)

전쟁기념관(館長 朴益淳)은 6.25전쟁 당시 재일 학도의용군으로 자원 입대하여 89회나 출격하여 적지를 폭격하는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전사한 박두원(朴斗元) 공군 대위를 '7월의 호국인물'로 선정 발표했다.

박두원 대위는 1926년 7월 경북 경주시에서 태어나 7세 되던 해 도일(渡日)하여 1943년 사가중학교와 비행학교를 졸업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 해 10월 재일 학도의용군으로 자원 입대하여 대구와 영천 전투에 참가했다. 학도병으로 지상전투에 참가하던 중, 국군에 전투비행대가 있다는 사실과 전투조종사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재일학도 의용군 64명 중 유일하게 공군 전투조종사로서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되었다. 공군에 편입된 박 대위는 1952년 3월, 공군소위로 임관하여

공군 최초의 비행단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던 제1 전투비행단 제10 전투비행전대에 배속되어 F-51무스탕 전폭기의 조종간을 잡게 되었다. 이후 5개월간 89회라는 경이적인 출격을 감행한 박 대위는 원산, 고성, 간성, 신안주 등지의 적 탱크진지 공격과 보급로 차단작전에서 최우수 조종사로서 무수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52년 8월 2일, 89회 째 출격하던 날, 기상악화로
계획된 고도를 취하지 못하고 속초 상공을 지나던 중 적의 대공포화를 맞아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으니 그의 나이 스물 일곱이었다.

전투조종사가 되면서부터 평소에 최소한 100회의 출격을 희망했던 박 대위가 목표를 눈앞에 두고 89회를 마지막으로 산화하자, 동료 조종사들은 다음날부터 그의 영정을 들고 교대로 출격하여 100회 출격기록을 세우는 눈물겨운 전우애를 발휘했다.

정부는 그의 큰 공훈을 기려 대위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7월 4일(목)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는 유족과 공군 주요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행사가 거행된다
첨부파일
공공누리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자치행정과
  • 문의처 032-440-2436
  • 최종업데이트 2023-05-18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