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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회보

{8월의 호국인물} 장철부 육군 중령(1921. 4. 17 ∼ 1950. 8. 4)

담당부서
자치지원과 (032-440-2430)
작성일
2003-10-05
조회수
1489
{8월의 호국인물} 장철부 육군 중령(1921. 4. 17 ∼ 1950. 8. 4)


전쟁기념관(館長 朴益淳)은 일제강점기 광복군으로 무장독립투쟁에 참가하고 6.25전쟁 당시에는 기병대대장으로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순국한 장철부(張哲夫) 육군 중령을 '8월의 호국인물'로 선정 발표했다.
1921년 4월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장철부 중령은 1944년 1월 일본 중앙대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갔으나 두차례의 시도 끝에 탈출하여 항일 유격대에서 유격대장으로 무장 독립투쟁을 벌였으며, 1945년 5월에는 김구 선생의 추천으로
중국 황포 군관학교에 입교하여 1947년 기병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1948년 육사 5기로 임관한 그는 소대장, 육사교관등을 역임했으며 기갑연대의 창설과 더불어 기병대대장(소령)으로 근무하던 중 6.25전쟁을 맞게 되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장중령은 의정부에서 수색작전을 전개한 후 한강 이남으로 진지를 이동하여 6월 28일 한남동의 적진을 야습하여 적을 크게 교란시켰다. 이어 29일에는 한강을 도하하는 북한군 수백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고 7월 2일부터 4일까지 과천에서 적의 선견대를 공격하여 적의 남하를 지연시키는 전공을 세웠으며 충남 공주에서는 협공으로 북한군 제6사단 1개 대대를 섬멸시키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장중령은 1950년 8월 4일, 경북 청송·경주로 진출하려는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복부와 팔에 총탄을 맞는 중상을 입고도 최후까지 총격전을 벌이다 대대 지휘소가 점령되기 직전 '포로가 되는 수치를 당하느니 죽음을 택한다'며 권총으로 자결했다.
정부는 그의 전공을 기려 중령 특진을 추서했으며,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으로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8월 8일(목 14:00)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는 유족과 육군 주요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행사가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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