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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설화

단군의 세아들이 쌓은 삼랑성

출처
옛날 옛적에 인천은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5944
남한에는 단군과 관련된 유적이 두 곳밖에 없다. 그런데 그 두 곳이 모두 강화도에 있다. 단군께서 나라의 안녕과 백성들의 평안함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참성단(전국체육대회의 성화를 이곳 참성단에서 밝히는 이유도 단군과 관련된 이유에서다.)과,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이 그것이다.
삼랑성의 원래 이름은 발이 세 개 달린 솥을 엎어놓은 모습이라는 정족산성(鼎足山城)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군의 아들과 관련된 삼랑성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먼 옛날 단군께서 이 땅에 나라를 세우고 난 후, 한강 입구에 자리한 강화도를 주목했다. 만약 다른 나라가 이 땅을 침략한다면, 그들은 한반도의 가운데를 흐르는 한강으로 들어 올 것이고, 그들을 막기 위해서는 한강 입구의 섬인 강화도에 산성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곧 단군은 산성을 쌓는다는 것이 마음같이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알고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평소와 달리 말수도 적어지고 가끔은 먼 하늘을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단군의 세 아들이 나섰다.
“아버님,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희들이 도와 드릴 수는 없을까요?”
“음, 이제는 너희들도 다 컸으니까 내 뜻을 이해하겠구나.”
하시며 그간의 걱정거리를 이야기했다. 그러자 세 아들이 똑같이 대답했다.
“아버님, 이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아버님의 뜻대로튼튼한 산성을 쌓아 적들이 감히 이 땅을 넘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산성을 쌓으려면 많은 사람들이 필요할 텐데 어찌 너희 셋의 힘으로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일이므로 반드시 하늘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부터 단군의 세 아들은 성 쌓기를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자 건장한 남자들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말했다.
“단군님과 왕자님께서 이곳에 나라를 위해 성을 쌓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왔습니다.”
하늘이 도운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큰 바위를 주먹으로 두들겨 성 쌓기에 좋은 적당한 크기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쪽 산에서 저쪽 산으로 던지면 한쪽에서는 그것을 받아 성을 쌓아 나갔다. 모든 일은 순조롭게 이루어져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훌륭한 산성이 완성되었다.
세 봉우리로 이루어진 이 산을 단군의 세 아들이 한 봉우리씩 맡아서 성을 쌓았다고 하여 사람들은 사내‘랑(郞)’자를 써서 삼랑성(三郞城)이라 불렀다.
단군은 흡족한 모습으로 말했다.
“이제야 편안히 잠자리에 들겠구나. 너희들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반드시 후세에까지 전해질 것이다.”
단군의 예언대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쌓은 삼랑성은 훗날 위급한 상황에서 나라를 지키게 된다.
1866년 초,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 신부 9명과 많은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 당하는 사건(병인박해)이 발생한다. 프랑스 군대는 이 사건에 대한 보상과 함께 조선에서의 신앙의 자유를, 그리고 문호 개방을 요구하며 군함을 앞세워 강화도를 점령했다. 나라에서는 그들을 내쫓기 위해 양헌수 장군을 강화도로 파견했다.
프랑스 군대가 지닌 무기는 당시 세계 최고의 무기였다. 양헌수 장군은 삼랑성으로 그들을 유인하여 전투를 벌일 것을 계획했고, 이것이 적중하여 조선군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삼랑성 전투에서 패한 그들은 다음 날 서둘러 강화도를 떠나갔다. 단군의 생각대로 삼랑성이 나라를 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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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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