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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설화

김상용과 충렬사

출처
옛날 옛적에 인천은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1304
1636년 12월 어느 날 밤 한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어둠을 깨뜨렸다.
“상감마마, 북쪽의 오랑캐 10만 명이 압록강을 넘어 벌써 평양이 함락되고 지금 한양으로 향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무엇이 ? 청나라가 또 쳐들어왔단 말이냐?”
잠에서 깨어난 인조 임금은 걱정이 앞섰다. 몇 년 전 정묘호란 때 임금은 강화도로 피난을 갔고 거기에서 그들과 수치스러운 약속을 하고 돌려보낸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며칠 후 임금은 강화도로 피난을 갈 결심을 하고 이미 우의정의 벼슬을 지낸 김상용을 불렀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은 들으시오. 모든 것은 과인의 덕이 부족한 탓이오. 그러니 신은 종묘의 위패와 왕세자를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가서 우선 난을 피하도록 하시오.”
김상용은 생각했다. 강화도! 임진왜란 때도 그곳으로 피난을 가서 선원이라는 마을에서 머무른 기억이 난 것이었다. 자신의 호를 선원(仙源)이라 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러나 강화도를 지키는 책임을 맡았던 김경징과 이민구는 술과 여자에 빠져 있었다. 선원 선생은 몇 번이나 그들을 나무랐으나 그들은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적은 강화도에 상륙했고 김경징과 이민구는 배를 타고 도망을 갔다. 강화도가 적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강화도 함락 소식을 들은 선원 선생은 집안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입었던 옷을 벗어 주며 말했다.
“이 나라 왕실의 위패와 왕세자를 지켜야 할 내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구나. 이 죄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나. 만일 무슨 일이 있거든 이 옷으로 내 몸을 대신하여 장사지내게 해라.”
선원 선생은 뚜벅뚜벅 걸어서 강화성 남문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하인에게 화약통을 가져오게 하여 남문 위로 올라갔다.
화약통 위에 걸터앉은 선원 선생은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하인에게 일렀다.
“오늘은 이상하게 담배가 피우고 싶으니 부싯돌을 가져오너라.”
그러자 주위 사람들은 선원 선생의 의도를 알고 선생의 행동을 말렸다. 선생은 호통을 치며 모두 물러가게 하였다. 이때 그의 열 세 살 손자 수전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할아버지 저는 평소 할아버지의 사랑과 가르침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할아버지와 모든 행동을 같이 하겠습니다.”
이어 생원 김익겸과 별좌 권순장이 뒤따랐다.
“저희들도 대감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선원 선생은 그들의 뜻을 말릴 수 없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부싯돌로 불을 붙여 화약통에다 던졌다. 순간 하늘을 진동시키는 폭음과 함께 강화성 남문은 순식간에 폭파되었다. 얼마 후 사람들이 선생의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고 그 자리에서 한참 떨어진 선원면 선행리에서 선생의 신발 한 짝
만을 발견했다.
이 소식은 곧 임금에게도 알려졌다.
“오! 못난 과인 때문에 아까운 사람이 목숨을 잃었구려. 선생을 후하게 장사지내고 사당을 지어 그의 나라 사랑하는 뜻을 길이 이어가도록 하시오.”하며 인조 임금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곧 그의 신발이 떨어졌던 곳에 사당을 지어 김상용과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여러 사람들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사당의 이름을 처음에는 표충사라 하였으나 뒤에 충렬사로 고쳤다.
현재 남양주시 와부읍에는 당시 선원 선생이 벗어 준 옷을 묻은 김상용의 묘가 있고, 그 왼쪽에는 손자 수전의 묘가 함께 있다.
그러나 현재 충렬사가 있는 곳은 선원 선생이 기거하던 곳이라는 다른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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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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