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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설화

나라의 제사를 지내던 사라진 무인도 낙섬

출처
옛날 옛적에 인천은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2537
해안 매립으로 생긴 남구 용현5동, 지금은 철거된 개항 100주년 탑 부근에 작은 무인도 낙섬이 있었다. 이십여 년 전 바다를 매립하면서 섬 전체를 까뭉개 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일제 때 염전을 조성하기 위해 쌓은 긴 제방 끝에 낙섬이 있었다. 몇몇 문헌에는 이 낙섬을 ‘잔나비(원숭이) 섬’이라는 뜻의 ‘원도(猿島)’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명산이나 바다에서 나라와 고을의 안녕을 빌고 복을 구하는 제사를 지냈는데, 조선시대 인천도호부에서는 원도에서 서해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서해 용왕님께 비나이다. 나라와 저희 고을이 늘 태평하게 해 주시고 풍랑과 바람을 다스리시어 백성들이 마음 놓고 편안하게 바다 일에 종사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이렇게 인천 부사가 머리를 조아리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는 곳이 이 사라진 작은 무인도 낙섬이었다. 1861년에 제작된『대동여지도』에도 인천 앞바다에 원도가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무렵쯤 제사가 폐지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자세하지 않다.
낙섬의 이름은 제사를 드리는‘납섬’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또 잔나비를 뜻하는 우리말‘납’으로 전해졌다가 이것이 잘못 발음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그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잔나비를 뜻하는 ‘원도’로 썼다고도 한다.
낙섬에는 병자호란 때 의병장 이윤생의 일화가 전해진다. 이윤생은 인천에서 대대로 살아온 부평 이씨의 후손이다. 이윤생은 어려서부터 의를 중하게 여기고 지략이 있었으며 활 쏘기와 말 타기에 뛰어났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의 일이다. 이윤생은 의병을 모아 원도에 진을 쳤다.
“전쟁은 지형을 잘 이용하는 것이 우선이다. 강화와 남한산성을 호위하기 위해서는 이곳 원도가 가장 좋은 곳이다. 우리는 여기에 진을 친다.”
이윤생의 계략은 이곳을 가로막고 있음으로 해서 청나라 군사가 왕래하는 길을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역시 장군님 말씀대로입니다. 청나라 군대가 감히 근접을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이 따라 주어서 그리 된 것입니다. 더욱 철통같이 지킵시다.”
이윤생이 힘을 다하여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청나라 군대는 정말로 근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버티는 것도 거기까지였다. 작은 섬에 갑자기 의병을 모아 진을 친 까닭에 군비 물자가 충분할 리가 없었다. 이윤생의 군사는 화살이 다한 것이다.
한나절이 지나 이쪽의 화살이 다한 것을 눈치 챈 청군이 일제히 섬 안으로 쳐들어왔다.
“물러나지 말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라.”
이윤생이 큰 소리로 외치며 싸움을 독려했지만 중과부적 끝내 대부분의 의병들과 함께 이윤생도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 이윤생의 나이 34세였다.
전사 소식을 접한 부인 강씨는 곧 바다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고, 섬 안에서 요행이 살아남은 박성인이란 사람이 이윤생의 열한 살 된 아들을 거두어 길렀는데 이 아이가 뒤에 첨지중추부사라는 높은 벼슬에 오른 이정현이다.
이윤생과 강씨의 순국 사실이 조정에까지 올려지자 부인 강씨에게만 정려를 내렸다. 이윤생에게는 섬 안에서 전사한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만 정려를 내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철종 12년(1861) 마침내 그에게도 정려가 내려지고 좌승지에, 부인 강씨는 숙부인에 각각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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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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