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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설화

효자의 마을 오류동

작성자
옛날 옛적에 인천은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4139

계양동의 오류동 마을은 부평 땅의 고려 때 지명인 수주(樹州)의 소재지였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은 조선 시대에 효자의 마을로 명성이 높았다. 임진왜란 직후 부평 부사를 지낸 윤명선이라는 사람이 자리잡아 파평 윤씨 가문이 대대로 살아 왔는데 일가 모두가 효성이 깊었다.
이 윤씨 가문에서 정직하고 가난한 선비 한 사람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내가 잘 모시지 못해 아버님이 장수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어머님은 잘 모셔야지.”
선비는 밤이면 어머님 잠자리가 편안하신지 꼭 여쭙고 아침에 일어나면 잘 주무셨는지 살피는 혼정신성(昏定晨省)의 도리를 다하였으며,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다. 어머니의 환갑 잔치 날에는 어린아이처럼 색동저고리를 입고 춤을 추었으며, 남의 집 잔치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대하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소매에 넣어 와서 어머니에게 드렸다.
그러나 홀어머니가 병들어 누우셨고 효자의 보살핌도 보람 없이 병환이 점점 깊어 갔다.
“아, 어떻게 하면 내 어머님을 낫게 할 수 있을까.”
선비는 온갖 약을 구해 왔지만 늙은 어머니는 낫지 않았다.
온 천지가 흰 눈에 덮이고 눈보라가 치는 겨울이었다.
“어머님, 잡숫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아들의 말에 어머니가 대답했다.
“잉어를 한 마리 고아 먹고 싶구나.”
어머니는 모든 호수와 시냇물이 얼어붙은 한겨울에 그것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늙어 있었던 것이다.
아들은 걱정이 앞섰으나 어머니 앞에서는 웃으며 말했다.
“어머님, 꼭 구해 오겠습니다.”
그는 이곳 저곳 얼어붙은 호수와 시내를 찾아다니며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으려고 애썼다. 하루 이틀 사흘 얼어붙은 겨울 벌판을 헤매느라 아들은 온갖 고생을 다했다. 손발은 동상에 걸렸으며 얼굴도 야위어 갔다.
“쯧쯧쯧, 노망든 노인네의 소원을 들어 주느라 아들이 먼저 눈보라 속에서 얼어 죽겠군.”
이웃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으나 아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오늘도 잉어를 못 잡았구나 생각하고 아들은 지친 몸을 간신히 이끌고 부평 평야의 드넓은 벌판을 건너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수로의 얼음이 툭툭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무심히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아들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자기 넓적다리만한 잉어 한 마리가 얼음을 뚫고 나와 몸뚱이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잉어는 펄떡펄떡 뛰며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어서 나를 잡아다가 늙은 어머니 약으로 쓰라고 잉어 스스로 말하는 듯했다.
“고맙구나, 잉어야.”
아들은 잉어를 잡아 품어 안았다. 잉어는 얌전히 있었다.
아들이 잉어를 정성스럽게 온갖 좋은 약재와 함께 고아 어머님께 드렸다.
늙은 어머니는 병이 씻은 듯이 나아서 일어나셨다. 잉어는 지금도 환자들의 몸을 회복시키는 보양 식품으로 민간 요법에서 소중하게 여기는데 옛날에도 그랬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아들의 효성이 지극해서 하늘이 엄동에 잉어를 내려 주셨고 그래서 늙은 어머니가 병이 나았다고 칭송했다.
그 뒤 이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귀감으로 삼아 늙은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게 되었다. 그런 결과로 다시 효자들이 줄을 이어 나왔고 조정에서는 그들을 표창하는 효자 정려문을 넷이나 내려 보내 세상의 모범으로 삼게 했다.
이 마을 산기슭에는 백 년 전까지 윤기파∙윤정∙윤서∙윤상우의 정려각 네 개가 서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아이들이 새를 잡는다고 불을 놓다가 거기 옮겨 붙어 모두 불타고 말았다. 조선 조정은 일제에 강제 합병 당해 패망했고 다시 정려각을 내려 보내지 못했다. 그러나 선조의 효도 정신은 지금도 그들 가문에 핏줄을 타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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