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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중앙동

분류
중구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286
중앙동
중앙동은 인천항 개항 당시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에 속해있던 곳이다. 이 일대에 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각국지계가 생기면서 그 안에 편입됐고, 일제가 우리 나라를 삼키고 난 뒤 1912년에는 부내면 본정(本町)이 됐다. 지금은 형편이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에는 이곳이 인천의 중심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본식 이름으로도 본정이 됐던 것이다. 본정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본정 1,2,3 정목(町目)으로 나뉘어진다. 일제시대에 이곳에는 은행과 상점이 몰려 있어 실제로 인천의 중심가 역할을 했다. 광복 뒤인 1946년 이곳은 우리 이름을 찾아 중앙동이 되는데, 본정 1∼3 정목은 그대로 중앙동 1∼3가로 바뀌었다. 중앙동이란 본정과 마찬가지로 ‘인천 시내의 중심에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인천의 중심이 점차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며 이곳은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차츰 잃기 시작해, 이제는 옛 영화를 알아보기 어렵게 변했다. 1977년 중앙동은 인근의 관동, 해안동, 항동, 송학동을 합쳐 행정동으로 중앙동이 되며 그 동사무소가 있는 중심동이 됐다. 항동
항동(港洞)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선창동에 속한 해변이었다. 이곳에서 해안동으로 연결돼 있었고, 조선 중기까지 수군 기지 ‘제물진(濟物鎭)’이 있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간 뒤로는 조그마한 항구만이 남아 있었다. 그 뒤 구한말 이곳에 새로운 항구가 만들어졌다. 항동이란 이처럼 항구가 있어 붙은 이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금도 연안부두와 여객터미널이 있듯이 이곳에는 오래 전부터 항구가 있었으니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고, ‘인천항에 속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지금 항동의 상당부분은 1915년 일제가 바다를 메워 육지가 된 곳이다. 일제는 매립이 끝난 뒤 이곳에 자신들이 쓰는 행정구역 ‘정(町)’을 붙여 항정(港町)이라 이름지었고, 이것이 광복 뒤에 그대로 항동이 됐다. 하지만 항동은 항구와는 전혀 관계가 없이 ‘넓고 큰 동네’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는 ‘항’을 ‘크다’는 뜻의 우리말 ‘한’에서 발음이 바뀐 말로 보는 것이다. 이는 ‘큰 새’를 뜻하는 황새가 원래 ‘한새’였다가 발음이 바뀐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경우는 전국 곳곳의 땅이름에서 그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항골’ ‘한골’ ‘황골’ ‘한밭’ ‘함박’ 등이 모두 그런 경우이며, ‘항동’도 같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항동이 옛날부터 있었던 곳이 아니라 대부분 일제의 매립으로 새로 생긴 땅임을 따져보면 우리말 ‘한’이 바뀌어 동네 이름이 된 것으로 보기에 어려운 점도 있다.

관동
관동(官洞)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한 뒤 인천으로 들어온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일본지계의 중심지 땅이다.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로 개항 당시에는 별다른 이름이 없었다. 그러다가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고 나서 자유공원 일대의 지계가 없어지게 된 1912년 일본인들이 자기들 표현을 써 중정(仲町)이라 불렀는데, 지금 관동의 상당 부분이 개항 이후 이 무렵까지 바다를 매립해 생긴 땅이라고 한다. 1914년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 때는 일본인들이 이곳을 본정(本町) 1∼3 정목(町目)으로 나누어 인천부(仁川府)에 편입시켰는데, 본정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이곳은 일본지계의 핵심이 되는 곳이었다. 뒤에 인천이사청(仁川理事廳)이 된 주한 인천 일본영사관, 인천 거류민단 사무소, 경찰서, 우체국 등이 모두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이중 일본영사관은 바로 지금 중구청이 있는 터에 자리잡았던 것으로, 다른 기관들에 비해 가장 빠른 1883년 10월31일 세워졌다. 청국 영사관은 1884년 지금의 선린동 화교소학교 자리에, 영국 영사관은 역시 1884년 지금의 항동 오림포스호텔 자리에 들어섰다. 광복 뒤인 1946년 1월 일본식 동네 이름을 새로 바꾸어 지을 때 이곳은 이처럼 관청(官廳)이 많이 모여있던 곳이라는 뜻에서 관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하지만 이제는 1984년까지 인천시청으로 사용됐던 중구청만이 남아있을 뿐, 다른 관청들은 대부분 없어지거나 시내 신개발지로 옮겨 가버려 그 이름이 무색해졌다.
송학동
송학동(松鶴洞)은 자유공원과 홍예문 남쪽의 언덕 지역이다. 인천항 개항 당시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에 속해 있었고, 자유공원 일대에 만국지계 또는 각국지계라 불리던 서양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생기자 그 안에 편입됐다. 별다른 동네 이름이 없었는데, 1912년 일제가 자기들 식으로 ‘산수정(山手町)’이라고 불렀으니 이는 ‘산위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1914년 산수정은 일본식 행정 구역을 따라 1∼3 정목으로 나뉘어져 이어지다가 광복 뒤인 1946년 송학동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1∼3 정목은 그대로 1∼3가(街)가 됐다. 송학동이라는 이름은 이곳 언덕이 소나무가 울창하고 운치가 있는 곳이어서 붙인 것이라고 하는데, 많은 것이 바뀌어 버린 지금으로서는 그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송학동은 개화기 각국지계에 속했던 곳인 만큼 당시 활동했던 외국인들의 사연이 많이 남아있다. 이들 사연과 관련해 송학동에는 ‘약대이산’이라는 곳이 있다. 요즘은 거의 잊혀져 잘 쓰이지 않는 이름이지만 이는 원래 ‘약대인산’이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여기서 약대인은 개화기 지금의 송학동 3가 1번지 일대에서 ‘성 누가병원’을 열어 운영한 미국인 의사 랜디스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 말 이름이 남득시(南得時)인 그는 선교를 겸해 의료 활동을 했는데, 헌신적인 자세와 뛰어난 의술로 존경을 받아 사람들이 그를 ‘약대인(藥大人)’이라 부르고, 그의 병원이 있던 언덕을 ‘약대인산’이라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과로를 이기지 못해 1898년 3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송학동은 1977년 행정동으로 중앙동에 들어갔다.

홍예문
자유공원과 인천기상대가 있는 응봉산의 남쪽 송학동에 그 산줄기를 뚫어 만든 홍예문이 있다. 그곳의 돌벽을 뒤덮고 있는 담쟁이덩굴이 오랜 세월동안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름을 고유명사로 알고 있지만, 홍예문은 홍예(무지개)라는 말 그대로 ‘문의 위쪽을 무지개같이 반원형(半圓形)이 되게 만든 문’이라는 뜻의 건축용어이고 보통명사다. ‘아치(ARCH)’의 한자식 표현인 셈인데, 홍예문은 그냥 홍예라고도 하며, 문(門) 같은 것을 홍예 모양으로 만드는 일을 가리켜 ‘홍예(를) 틀다’라고 한다. 이곳에 있는 홍예문은 1905년 착공해 1908년에 완공된 것이다. 화강암을 쪼아서 수십m 높이로 쌓았는데, 이 문 위에 오르면 인천 앞바다와 항구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이 문을 만든 것은 인천항과 이곳 주변에 있던 일본인들의 조계에서 당시 경인철도 축현역(동인천역의 옛 이름)과 만석동 등지로 편하고 빠르게 물건을 실어 나르기 위함이었다. 그때 이들 지역 사이에는 직접 오가는 길이 없어 주변의 다른 곳으로 돌아서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해안선을 따라 길을 새로 만들어 보려했지만 해변이 험해 공사가 어렵고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문제가 있었다. 이 때문에 비교적 공사 규모가 적고 짧은 시간에 끝낼 수 있는 방법으로 이곳의 산줄기를 뚫어 문을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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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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