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교동(官校洞)
관교동(官校洞)은 조선 시대에 인천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문학동과 함께 조선시대 인천부 부내면의 일부였던 이곳에는 지금의 시청 격인 인천부의 청사가 있었던 것이다. 부(府)의 중심 동네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면의 이름도 부내면이 됐는데, 사람들은 이 동네에 대해 별다른 이름 없이 그저 ‘읍내’라 부르곤 했다. 그 주변에는 승기리, 동촌, 서촌 등의 자연 부락이 있었다.
그러다가 1903년 각 지역의 동네 이름을 바꿀 때 이들 동네가 읍내리와 동촌승기리로 나뉘어졌으며, 1906년에는 읍내리가 관청리(官廳里)와 향교리(鄕校里)로, 동촌승기리는 대승기리와 소승기리로 다시 나뉘어졌다. 이중 관청리는 이름 그대로 인천부 청사라는 관청이 있기 때문이고, 향교리는 인천 향교가 있기 때문이며, 승기리는 승기마을이라는 동네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1914년 일제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모두 새로 결정할 때 이중 관청리와 향교리가 합해져 관교리가 생기고, 대승기리와 소승기리는 승기리로 합해졌다. 결국 ‘관교’라는 동네 이름은 관청리의 ‘관’과 향교리의 ‘교’가 합해져 생긴 이름인 것이다.
인천부 청사가 이곳에 생긴 것이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여러 기록으로 미뤄 볼 때 인천이 군(郡)에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는 세조6년(1460) 이전, 조선 개국 초기에 이미 청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청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유림들이 제사를 지내거나 선비들이 모여 글공부를 하던 인천향교가 지금도 남아 있으며, 이곳이 이전에 향교리였던 것이다. 관교리는 그뒤 원정(元町)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광복 직후인 1946년 관교동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
한편 지금의 학익동에서 관교동으로 넘어가는 길은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고갯길이었는데, 이 고개 윗쪽 관청에 마을의 안녕과 다복을 빌던 도천단(禱天壇)이 있었다고 한다.
또 마을 서쪽에는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던 사직단(社稷壇)이 있었고, 남쪽에는 서낭제를 지내는 성황사(城隍祠)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그저 이야기로만 전해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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