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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도화동 쑥골

분류
미추홀구(舊 남구)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2277
남구 도화오거리 일대 시립 인천대학교 주변은 예로부터 쑥골이라 불려온 곳이다. 쑥골은 쑥고개와 함께 우리 나라 땅이름에서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것으로 그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글자 그대로 ‘쑥이 많은 곳’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숯을 굽던 곳’이라는 뜻으로 숯의 발음이 ‘숙’을 거쳐 ‘쑥’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 쑥골 일대의 역사를 볼 때 이 두 가지 해석은 사실과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는 ‘물이 많은 골짜기’라는 뜻으로 ‘수(水)골’이 숫골>쑥골로 바뀌었다는 해석이다. 이는 1950년대 지금의 제물포역과 인천대 사이에 비교적 큰 개울이 있어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가 되었다는 것이나, 이곳서 멀지 않은 송림동과 가좌동(개건너)사이 갯골에 일제시대까지 ‘번작이(번저기) 나루’라는 나루터가 있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삼고 있다. 네 번째는 ‘숲이 우거진 곳’이라는 해석으로, 숲의 옛말은 ‘’이었기에 골>숫골>쑥골의 과정을 거쳐 지금의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설명이다. 이는 지금의 인천대학교 일대가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나무가 우거진 동산이고, 큰 공동묘지도 있던 곳이라는 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인천의 원로였던 고 신태범 박사도 그의 책 『인천 한세기』에서 ‘쑥골과 도마다리 일대에는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지고 중국인 채소밭이 펼쳐져 있어 참새, 콩새, 산새들이 많아서 툭하면 공기총을 들고 새 사냥을 다녔다’고 회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설명은 모두 만들어 낸 이야기일 뿐이고 사실 쑥골은 이곳에 벼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다.
벼를 대표로 한 곡식을 가리키는 우리 중세어가 ‘쉬’였음은 조선 중종 때 최세진이 지은 한자학습서 『훈몽자회』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쉬’에 마을이나 골짜기를 뜻하는 우리말 ‘골’이 붙어 ‘쉬골’이 됐고 이것이 다시 수골>숫골을 거쳐 쑥골까지 온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 동네가 예로부터 ‘베말(벼마을)’이라 불렸다는 사실 뿐 아니라, 구한말에 이 동네가 ‘벼 화(禾)’자를 쓴 ‘화동(禾洞)’으로 이름이 바뀐 데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한편 쑥골 옆 지금의 수봉공원 진입로 일대인 도마다리는 구한말에 도마교리(導馬橋里)가 됐는데, 1914년 도마교리와 화동의 앞 글자가 합해져 도화리가 생겼고, 이것이 광복 뒤에 도화동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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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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