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동(延壽洞)
택지개발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돼버린 연수구 연수동(延壽洞)은 구한말 인천부 시절 먼우금면에 속한 마을들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는 고촌말, 솔안말, 함박말, 장승배기, 머그미 등의 여러 마을이 있었다. 이들은 1903년 인천부가 동네 이름을 바꿀 때 함박리(咸朴里)와 망해리(望海里)의 둘로 나뉘어졌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부천군 문학면으로 들어가며 모두 한데 합쳐져 연수리가 됐다. 한자로 풀이하면 ‘수명[壽]이 연장[延]되는 동네’, 곧 ‘오래 사는 동네’라는 좋은 뜻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이름은 일제가 자신들이 좋아하는 ‘목숨 수(壽)’자를 갖다 붙여 마음대로 지은 것일 뿐 원래 이 동네의 유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전해오는 말로는 이곳이 문학산 남쪽에 있어 날씨가 따뜻하고, 바닷가에 있다보니 공기도 맑아 건강에 좋기 때문에 연수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고도 한다.
또는 『조선왕조실록』에 “길주에 199세 된 노인이 있고, 인천에도 100세 된 노인이 있다”고 한 기록을 근거 삼아 연수동의 이름 유래를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뒤에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이는 남동구의 만수동(萬壽洞)이나 장수동(長壽洞)과 똑 같은 경우이다.
연수리는 1940년 일제가 일본식 행정구역 이름을 붙여 연수정(延壽町)이라고 했다가, 광복 뒤인 1946년 이를 그대로 이어받아 연수동이 됐다. 한편 연수동은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곳곳에 바닷물이 들어오는 바닷가 마을이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곳곳에 방죽을 쌓고 농경지를 만들려 애를 썼는데, 그래서 지금까지도 숭어방죽이나 변산이방죽, 함박리방죽 등 여러 방죽의 이름이 전해오고 있다.
일제시대에 들어와서는 인천이 천일염(天日鹽), 곧 햇볕에 바닷물을 말려 얻는 소금의 주산지가 되면서 이곳에도 대규모 염전이 만들어졌고, 이 때문에 염전마을이라는 동네 이름도 아직껏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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