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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부평동 원통고개(圓通峴, 元通峴), 원통이고개

분류
부평구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220
부평삼거리에서 간석오거리에 이르는 고개를 원통고개 또는 원통이고개라 부른다. 이 원통고개에 대하여 몇 가지 구구한 전설이 있다. 예로부터 삼남지방에서 나라에 바치는 대동미(大同米)의 운송을 험난한 강화 ‘손돌목’을 지나 한강을 거슬러 경창(京倉)으로 보내는데 항상 손돌목을 지나기가 위험하여 이 뱃길을 단축하고자 굴포(掘浦)를 착안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 고종 때 권신 최충헌의 아들 최이(崔怡)가 먼저 강을 뚫고자 구상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또 조선 중종 때의 문신 김안로(金安老)가 한강에서 인천 북항을 잇는 수로를 뚫는 굴포작업을 시작하여 한강에서 부평 뜰을 거쳐 원통이고개 앞까지 이르렀다 한다. 그런데 이 고개(산)가 전부 암반으로 깔려 뚫지 못하고 실패하였으니 그간 큰 고생을 하였는데 이 고개를 못 뚫어 모두가 허사로 돌아갔으므로 그만 원통하다고 하여 원통이고개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할 때 무학대사가 부평땅에 와서 살펴보니 계양명산에 한강을 끼고 들이 넓어 도읍지에 적격일 뿐 아니라 산골짜기도 꼭 백 개라 돌아가 이성계에게 그 사실을 품계 하였다. 그런 데 그후 이성계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다시 와서 자세히 세어보니 산골짜기가 한 골이 모자라는 99개밖에 안되어 그만 도읍지를 단념하게 되었다. 그 연유를 자세히 살펴보니 놀랍게도 이 원통이에 봉우리가 있어 본래 골이 깊었는데 이것이 없어지고 얕은 언덕으로 바뀌어 있었으므로 ‘아! 원통하고 원통한지고! 봉우리가 언덕으로 변하다니!’하고 탄식하게 되어 이 때부터 이 산을 원통산이라 부르고 또 이 고개를 원통이고개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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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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