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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김방경(金方慶 : 고려 항몽기)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088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병부상서와 한림학사를 지낸 효인(孝印)이다. 몽골[蒙古]의 침공을 받자 고종 35년(1248) 서북면 병마판관(兵馬判官)이 되어 위도(韋島)로 입보(入保)하였다. 거기에서 해조(海潮)를 막기 위하여 제방을 쌓고 10여 리에 이르는 평탄한 지형을 농사에 이용하여 상당한 수확을 거두게 했을 뿐 아니라,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우물이 없는 불편을 덜게 하여 모두 그 지혜를 칭송하였다.
고려가 강화로 수도를 옮겨 대몽 항전을 벌였을 당시, 일단 강화(講和)를 한 다음 원나라와 개경 환도 문제로 실랑이를 벌였는데, 이때 이장용(李藏用)의 천거를 받아 사신으로 원나라에 파견되어 고려와 원나라의 군사적 충돌을 막고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진력하였다. 삼별초의 난에는 그 평정에 성공하였고, 일본 정벌에는 태풍을 만나 실패를 거듭하였다. 이 기간 중에 모함을 받아 모진 고초를 받기도 하였고, 참혹한 고문에 시달림을 겪기도 했다. 충렬왕 9년(1283) ‘삼중대광첨의중찬판전리사사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으며, 이어서 첨의령(僉議令)이 가직되고, ‘상락군개국공(上洛君開國公)’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강도지(江都誌)』에 의하면 김방경 원수(元帥)가 강화 온수리에 우거(寓居)하였다고 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곳을 ‘원수골’이라고 불렀던 것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와전되어 ‘온수골’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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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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