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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김취려(金就礪 : 고려 고종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332
고종 3년(1216) 몽골군에게 밀린 거란이 형세가 불리해지자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 삭주(朔州), 영주(寧州)로 침입하여 약탈과 함께 무고한 백성들을 학살하자 고려는 김취려 대장군을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에 임명하고 침입한 거란군을 토벌케 했다. 그는 조양진(朝陽鎭)에서 적을 대파시키고 연주(延州)에 침입한 거란군을 장군 기존정(奇存靖)과 더불어 무찔러 사로잡은 적 포로가 2천 4백 명이나 되었다. 적군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청새진(淸塞津)을 넘어 퇴각했다. 1217년에는 또 국경을 넘어 온 거란군 5천을 크게 무찔러 명주(溟州 : 江陵) 쪽으로 패주시켰고, 다시 여진족과 합세하여 쳐들어 온 적과 격전을 벌였다. 1218년 또 다시 침입한 거란군을 조충(趙沖)과 함께 강동성(江東城)으로 쫓아냈다. 그 밖에도 동진국(東眞國)을 제후국으로 삼아 강동성을 함락시켜 북방을 편안하게 하였다. 그는 많은 공을 세워 1221년 ‘참지정사판호부사(參知政事判戶部事)’가 되었으며 고종 8년(1222) 시중이 되었다. 고종 21년(1234) 강화에서 서거하니 고종이 친히 빈소에 나아가 조의를 표명하고 3일간 정사를 중지시켰다. 시호는 ‘위열(威烈)’이며 묘소는 강화 진강산 서록 하일 뒷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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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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