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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김준(金俊 : 고려 원종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250
고려의 무신으로 초명은 인준(仁俊)이었다. 집권자 최우(崔瑀)에게 발탁되어 전전승지(殿前承旨)가 되었으며, 최항(崔沆)이 정권을 세습하는 데 공이 커서 별장이 되었다. 최항의 뒤를 이어 최의(崔훺)가 들어섰으나 그에게 관심을 얻지 못하자 고종 45년(1258) 유경(柳璥), 박송비(朴松庇) 등과 모의하여 최의를 죽이고 왕정복고를 꾀하였다. 그로 인하여 장군에 오르고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의 실권이 유경에게 치우치자 아우 충(沖)과 함께 고종에게 참소하여 유경을 파면케 하고, 그 일당을 모조리 몰아낸 다음 대권을 잡았다. 1259년 자신을 위사공신 1등으로 하고 ‘익양국개국백(翼陽國開國伯)’으로 봉하게 했다. 원종 4년(1263) 원종이 그를 교정별감으로 임명한 다음 몽골로 들어가자 실질적 국정의 책임자가 되었다. 원종 귀국 후에는 시중이 되어 ‘해양후(海陽候)’에 책봉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가 되면서 백성에 대한 탐학이 극심해지고 권력을 남발하여 몽골로부터 입조하라는 사신이 왔다. 이에 뒤가 켕긴 나머지 몽골 사신을 암살한 사실이 왕에게 알려져 원종은 강윤소(康允紹), 임연(林衍) 등과 합세, 그를 참살 제거하였다.
『강도지(江都誌)』에 의하면 김준이 태어나 자란 양도면 건평리 해망은 원래 그의 작위명을 따서 해양향(海陽鄕)이라 하였다가, 김준이 망하였다고 하여 해망(海亡)으로 변천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김준이 온수리 해양당에서도 살았다고 하여 해양당이라는 지명을 얻었다고 전해진다고도 한다. 『강화인물사』 집필자가 상고한 바에 의하면 건평리 해망은 생활의 근거지였고, 온수리의 해양당은 별장같은 놀이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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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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