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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최용소(崔龍蘇 : 고려 말 ∼ 조선 초)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788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전설에 의하면 강화도 출신이라고 한다. 고려 공민왕 초에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옮겨 다녔고, 태조 3년(1394)에 회례사(回禮使)로 일본 큐슈에 파견되어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 이마가와[今川]에게 왜구를 토벌하여 양국의 우호를 도모하자는 국서를 전하고, 이마가와가 파견한 승려 종구(宗俱)와 함께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 570명을 대동하고 귀국했다. 태종 13년(1413) 형조판서로서 한성부윤 김겸(金謙)과 함께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415년 전라도의 조운책(漕運策)을 진언하였다. 명나라에 갔을 때에는 명나라 태종 황제가 인물이 청아하고 덕행이 높다는 보고를 접하고 그를 예로서 대우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화공에게 명하여 비단 두 폭에 초상화를 그려 친필로 제정공(齊貞公) 최용소의 상(像)이라 쓴 다음 하나는 편전에 걸고 한 벌은 본국 후손에게 보내주었다. 나라에서도 우의정을 추증하고 ‘해동부자(海東夫子)’라는 호를 내렸으며, 시호를 ‘제정(齊貞)’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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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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