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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최영(崔瑩 : 고려 말기)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3814
고려 말의 명장이다. 처음에 양광도도순문사(揚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왜구(倭寇)를 자주 토벌하여 그 공으로 우달치[于達赤 : 司門人]가 되었다. 최영의 군인으로서의 경력은 왜구와 홍건적 퇴치로 점철되었다. 우선 공민왕 8년(1359) 홍건적 4만 명이 침입하여 서경이 함락되자, 다른 장수들과 함께 이를 여러 방면에서 무찔러 공을 세우고 승진했으며, 1361년 홍건적 10만이 다시 침입하여 개성을 함락시키자 이듬해 안 우, 이방실(李芳實) 등과 이를 격퇴하여 개성을 수복하고 그 공으로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어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올랐다.
왜구를 물리친 경우를 보면, 공민왕 6년(1357) 배 4백여 척으로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구를 복병을 이용하여 격파하였다. 공민왕 13년(1364)에는 왜구가 교동(喬桐), 강화에 침입하자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가 되어 동강에 진주하였는데, 이때 신돈의 무고로 귀양을 갔다가 신돈이 처형된 후 복귀되었다. 다음해 다시 왜구가 연산(連山)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했을 때,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패배하자 노구를 이끌고 자원하여 홍산(鴻山 : 扶餘)에서 크게 무찔러 그 공으로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이 되었다. 우왕 3년(1377)에는 도통사가 되어 강화·통진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다음, 왕에게 상주하여 교동·강화의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군자금에 충당하게 했다. 이어 1378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에 침입하자 이성계(李成桂), 양백연(楊伯淵) 등과 함께 적을 크게 무찌르고 그 공으로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다. 이무렵,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고하여 철령 이북과 이서, 이동을 요동(遼東)에 예속시키려 하므로, 요동 정벌을 결심하고 왕과 함께 군사를 출동시켰다. 그러나 3만 8,8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민수(曺敏修) 좌군도통사와 함께 떠난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사건으로 요동 정벌은 무위로 돌아가고 역성혁명을 일으킨 이성계에게 참살당했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우고 6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넋을 위로하기도 했다.
강화에는 최영 장군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고기잡이 어부들은 해양신으로 믿어 왔다고도 한다. 무속에서는 당굿의 수호신으로 전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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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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