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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정희량(鄭希良 : 조선 연산군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328
정희량은 사림파(士林派)의 종조(宗祖)인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성종 23년(1492)에 수석으로 생원(生員)에 합격했다. 연산군 1년(1495) 문과에 급제하고, 연산군 3년(1497)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의 신분으로 “임금이 마음을 바로잡고 경연(經筵)에 근면하며, 간언(諫言)을 받아들이고, 현사(賢邪)를 분별하며, 상벌(賞罰)을 공정히 하고, 재용(財用)을 절제할 것”을 상소하여 왕의 미움을 샀다. 연산군 4년(1498)에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난언(亂言)을 범하고 난을 고하지 않았다는 혐의로 의주(義州)에 유배되었다가 김해로 이배된 후 연산군 7년(1501)에 풀려났다. 연산군 8년(1502) 모친상을 당하여 집상(執喪)하던 중,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날 것을 미리 짐작하고 표연히 집을 나가 김포 강변에 상복과 짚신을 벗어놓고 사라졌다. 그 뒤 이천년(李千年)이란 이름으로 변성명하고 산사(山寺)를 유력(遊歷)하다가 만년에 정주군(定州郡) 심연동(沈淵洞)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한다. 그의 별호 허암(虛庵)은 그가 거주하던 계양산(桂陽山) 서북쪽 허암봉에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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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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