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생(李允生 : 조선 인조 연간)
이윤생은 부평 이씨로 인조 14년(1636)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원도(猿島 : 낙섬)에 진을 쳤다. 이는 청나라 군대의 유격병들이 내왕하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대한 보장지세(保障之勢)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11월 24일 청나라 군사는 닥치는 대로 노략질을 일삼으며 쳐들어 왔으나, 이윤생이 다가오는 적마다 모두 사살하였다. 적군은 도저히 접근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일단 패주하였으나 이튿날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
이윤생이 역시 힘을 다하여 사살하자 적군이 감히 근접할 수가 없었는데, 반나절이 지나 이쪽의 화살이 다한 것을 눈치 채고 일제히 섬 안으로 쳐들어 왔다. 그는 끝까지 눈을 부라리며 소리 높이 적군을 꾸짖다가 살해당했으며 의병들도 대부분 전사하였다. 그때가 바로 인조 15년(1637) 1월 25일로서 강화도가 적군에게 함락된지 3일 후이고, 남한산성을 개성하게 되는 5일 전이었으니, 이 때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그의 부인 강씨(姜氏)는 부군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 곧 바다에 몸을 던져 부군과 의절(義節)을 함께 했다. 섬 안 진중(陣中)에서 요행히 살아난 박성인(朴性人)이 그의 11세 아들을 거두어 길렀는데, 그가 나중에 성장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은 이정현(李廷賢)이다.
이윤생은 철종 12년(1861)에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부인 강씨에게는 숙부인(淑夫人)이 추증되었으며 정려(旌閭 : 시지정 기념물 제 4호)가 내려졌다. 인천시 남구 용현동 442번지에 그의 후손이 각우(閣宇)를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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