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인천인물

김수남(金秀南 : 조선 인조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619
김수남은 인조 2년(162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감찰을 지냈다. 인조 8년(1630)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병자호란에 묘사(廟社)를 따라 강화도로 피난하여 왔으나 김경징 등 방어책의 실수로 강화성이 유린되자 홍명형(洪命亨)과 같이 김상용을 따라 남문루에 올랐다. 김상용이 순국하려고 여러 사람을 물리치게 한 다음 김수남에게 말하기를, “벼슬의 질서에는 높고 낮음에 분별이 있으나, 신하로서 나라를 위하여 죽고자 하는 일편단심이야 다를 수 있겠느냐. 내가 그대와 같이 죽으면 유감이 없겠다” 하니 김수남도 또한, “남아로 태어나 진충사국(盡忠死國)하는 바는 떳떳한 바이거늘 나라의 꼴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후일에 원하는 바 오직 두 아들이 어머니를 위하여 효행을 다 하여 준다면 나는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라고 쓴 유서를 노복(奴僕)에게 주어 처에게 전해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남문루에서 분사(焚死)하였다. 뒤에 승지에 추증되었고, 강화 충렬사와 은진의 금곡사에 제향되었다.
공공누리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문화유산과
  • 문의처 032-440-838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