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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김교창(金敎昌 : 1889∼1959)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135
김교창은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仙杏里)에서 생장했다. 1919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동지인 홍면(洪冕)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26일에는 왕광연, 홍명성, 홍복룡, 김도하 등과 함께 송산면 앞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거사 동지들과 송산면사무소 및 그 뒷산에서 만세 시위를 계속할 계획을 세우고 시장 장날인 28일 홍 면, 홍문선, 홍남후, 홍승한, 민용문 등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일시에 시위운동을 펼쳤다. 이 때 일본 순사부장으로 있던 노구치[野口]가 지휘하는 경찰이 출동하여 저지하려 했으나 군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렇게 되자 노구치 순사부장과 시위 주도자들간에 팽팽한 시비가 벌어지고, 성난 노구치 순사부장의 권총이 발사되어 홍 면 동지가 중상을 입었다. 이를 목도한 주도자들과 군중들의 노도와 같은 함성으로 시위가 더욱 격해졌을 뿐 아니라, 급기야 성난 시위 주도자들에 의해 노구치가 돌에 맞아 죽는 큰 사건으로 번지고 말았다. 사건이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간 탓으로 시위 주도자들은 일경(日警)에게 모두 체포 구속되었으며, 1920년 7월 5일 김교창은 고등법원에서 소요 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광복 후 훨씬 뒤에야 정부에서 그 사건을 파악하고 그 공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했으며, 그의 장한 뜻을 기리어 1984년 강화군 선원면 창리에 소재한 묘소에 기적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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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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