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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박길양(朴吉陽 : 일제시대)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146
박길양은 강화읍 관청리에서 출생한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유경근(劉景根)으로부터 독립공채증서 5백원권 1매를 전달받았다. 그것을 계기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4년 3월 서봉준(徐鳳俊), 김훈태(金勳泰), 이학신(李學信) 등과 강화중앙청년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3월 「동아일보」 강화지국장으로 있다가 이 해 8월에 「시대일보」 강화지국장을 맡았다. 다음해에는 4월 15일 개최될 예정인 ‘전조선 기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울로 상경했다. 이와 함께 같은 달 20일 개최하기로 예정된 ‘전조선 민중운동자대회’에도 강화지역 준비위원으로 참석하기로 하였다.
이 무렵 여러 갈래의 사회주의운동 단체들이 통합의 뜻을 굳혀 4월 17일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으며, 조선공산당 청년조직체인 고려공산청년회도 결성되었다. 서울에 상경해 있었던 박길양은 18일밤 조봉암(曺奉岩)의 안내로 박헌영(朴憲永)을 책임비서로 한 조선공산청년회에 가담하였다. 이후 강화로 돌아와 지역 청년운동단체를 통합하기 위한 강화청년연맹을 결성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25년 11월 22일에 발단된 신의주 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에 가담한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박길양도 이 때 체포되어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6년형을 선고받은 후, 서대문형무소에 이감되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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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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