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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박헌용(朴憲用 : 1882∼1940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019
당대에 명성이 높은 한학자이며, 민족사관이 뚜렷한 독립유공자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경기문장(京畿文章)으로 알려졌다. 이건승(李健昇)과 강화 하도면(下道面) 사기리(沙器里)에서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서 법률을 전공했으며, 동덕고등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독립운동에 관여하여 임시정부 요인 김석황(金錫璜)과 연락, 군자금 조달 및 정보 연락을 하였으며, 서울에서 심상옥(沈相玉) 등과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6년 황기범(黃基範)과 함께 상해로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지폐인쇄기를 구입하여 만주 안동현(安東縣)으로 밀반출하다가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인천경찰서에서 2년 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안창호 선생과 제휴하여 군사연락원으로 있다가 산해관(山海關)에서 다시 체포되어 여순(旅順) 감옥에서 3년형을 살았다. 다시 출옥한 후, 요시찰 대상자가 되어 강화에서 여생을 연금 상태로 지냈다.
강화 향토사에 남다른 애착을 품어 1926년에는 향토 곳곳에 산재한 시고(詩稿)를 엮어 『강도고금시선(江都古今詩選)』을 편술하였고, 1931년에는 강화 역사를 재정립한 『강도지(江都誌)』를 편찬하여 강화 역사 문화 소개에 크게 발자취를 남겼다. 1940년 59세를 일기로 타계했으며, 한국 현대 서예가 10걸(傑)의 한 사람인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이 그의 유일한 혈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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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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