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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길영희(吉暎羲 : 1900∼1984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507
길영희는 평북 희천(熙川) 태생으로 19세 때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 3·1만세운동 때 학생 대표로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6개월 징역에 집행유예 3년 선거를 받고 학적을 박탈당했다. 24세에 다시 배재고보 4학년으로 편입, 26세로 졸업했다. 그 해 일본 히로시마[廣島] 고등사범학교에 입학, 30세에 졸업하고 배재고보 교사가 되었으나 1년 후 경신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34세 때 뜻이 맞는 동지들과 안변(安邊) 개간사업 민립농과대학 설립 계획을 세웠다. 36세 때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으로부터 민족의 장래에 관한 교화를 받고 39세 때 인천 만수동에 후생농장(厚生農場)을 착수했다. 40세 때는 경신중학교를 사임하고 인천 후생농장에 귀종하여 농업 입국의 투지를 펴 나갔다.
1945년 민족 해방을 맞자 인천 유지들의 추대로 인천중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이후 민족교육 수립에 전력을 기울여 나갔다. 그는 우선 영재교육을 목표하여 1952년부터 53년까지 문교부 주최 전국학술경시대회에서 3연승을 하는 실적을 올렸으며, 전국 중학교 가운데 가장 높은 서울대학 합격률을 차지했는가 하면, 제물포고등학교를 인가받아 교장에 취임했다. 1956년에는 무감독 시험제를 창안, 실시했고, 교지「춘추」를 발간하여 1960년 전국고교 교지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였고, 제물포고교 제5회 졸업생이 서울대학교 입시에서 수석 합격을 하기도 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5년 일찍 정년퇴임을 하고 자택에다 대성학원(大成學園)을 설립 경영해 가다가, 1967년 충남 예산에 가루실농민학원을 설립하고 생애를 마칠 때까지 이끌어 갔다. 그의 교육열은 인천에서의 영재교육 활동으로 큰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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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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