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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장석우(張錫佑 : 1871∼1942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955
장석우는 강화 출신으로 1900년에 주명서(朱命瑞), 김용태(金鏞泰) 등과 주단포목전인 ‘서흥태(瑞興泰)’를 일으켜 번창 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천 상업계에 중추 인물로 떠올라 정치국(丁致國), 정영화(鄭永化), 최승우(崔承宇) 등과 함께 인천조선인상업회의소(仁川朝鮮人商業會議所)를 이끌어 나갔다. 한일합방이 되면서 조선인상의(商議)가 일인상의(日人商議)에 합쳐지자 조선인 의원(議員) 중 특별회원으로 뽑혔으며, 1920년에는 조선인에게 유일하게 한 자리가 주어지는 부회두(副會頭)에 선출되기도 했다. 3남인 광순(光淳)의 권유에 따라 1940년 부평(현 경찰대학 자리)에 고등여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도 기여했다. 8·15 광복 이후 학교의 운영권은 광순에게서 천주교 측으로 넘어갔는데, 이 학교가 현재의 인천박문여자중고등학교이다. 지금도 이 학교 강당에는 설립자인 장석우의 영정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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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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