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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조봉암(曺奉岩 : 1899∼1959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7523

조봉암은 강화 태생이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여 1년 간 복역하였으며, 출옥 후 일본에 건너가 도쿄중앙대학에서 1년 간 정치학을 공부하고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이념에 의한 독립 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귀국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했고, 그 산하단체인 고려공산당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이 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상하이(上海)를 경유, 모스크바에 가서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이어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 공산대학(共産大學)에서 2년 간 교육을 받았다. 귀국 후에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을 조직, 문화부책으로 활동하다가 상하이로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 조선대표에 임명되고 이에 ML당(黨)을 조직하여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 간 복역했다.
출옥 후 인천에서 저항운동을 하다가 다시 검거되었으나 광복과 함께 풀려났고, 인천에서 치안유지회, 건국준비위원회, 노동조합, 실업자대책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겸 인천지구 민전의장(民戰議長)에 취임했다. 이듬해 남로당 당수인 박헌영에게 충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공산당을 탈당하여 우익 진영에 가담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이어 초대 내각의 농림장관으로 입각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52년 제2대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했다. 1956년에도 제3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이 해 11월 진보당(進步黨)을 창당하고 위원장이 되어 활동하다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7월 31일 처형, 망우리 공원에 안장했다.

이후 2007년「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진보당 사건의 재심을 권고하였으며, 2010년 대한민국 대법원이 재심을 결정했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59년 2월 27일 선고된 4291형상559판결에 대한 재심으로서, 원심판결과 제1심판결 중 유죄 부분을 파기(대법원2008재도11)하고 죽산 조봉암의 국가변란과 간첩 협의에 대해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국가변란 혐의에 대해 "진보당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배했다고 볼 수 없다. 진보당의 통일정책도 북한의 위장된 평화통일론에 부수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간첩 혐의에 대해서도  "유일한 직접증거인 증인(양명산)의 진술은 일반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부대가 증인을 영장 없이 연행해 수사하는 등 불법으로 확보해 믿기 어렵고 합리적인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선고했다. 이로써 선생은 1959년 사형당한 이래 52년 만에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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