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독립운동가 민영환(閔泳煥) 선생
○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민영환선생[호 : 계정(桂庭), 1891.7.2∼1905.11.30]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 1871년 7월 서울에서 태어난 선생은 광무황제의 외가이자 처가인 여흥 민씨 출신으로 광무황제와 내외종간이며 명성황후의 조카뻘이 되는 황실의 지친이었다.
○ 이러한 가문의 배경, 광무황제와 명성황후의 신임으로 1878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선 이래 여러 요직을 거쳤다. 하지만 생부인 민겸호는 임오군란으로, 양부인 민태호는 갑신정변으로 잃는 개인적 비극도 겪었다.
○ 특히 1896년 5월에는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이듬해 6월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식에 외교 사절로 참석한 일이 있었다. 두 차례에 걸친 이러한 해외 여행은 근대적 사고와 조국 근대화에 대한 열망과 신념을 갖게 하였다.
○ 그같은 신념이 표출된 것이 1차 해외 여행에서 귀국한 뒤 이루어진 독립협회의 계몽운동과 자주민권자강 운동에 대한 지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군사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조국을 근대 국가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 하지만 수구파의 반대와 탄압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러일전쟁 직후부터 일제의 본격적인 침략을 받게 되었다. 이에 황실 측근 관리로 일제의 잇따른 침략 조약의 강요에 저항하였지만, 일제와 친일 각료들에 의해 한직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 그러던 중, 일제는 제국주의 열강과의 거래를 통해 한국 지배를 승인 받은 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조병세와 함께 매국 대신의 처단과 조약 파기를 여러 차례 상소하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위협과 탄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황실의 은혜에 보답하고 국민들을 깨우쳐 자유 독립을 보존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05년 11월 30일 오전 6시경, 단도로 목을 찔러 45세의 한창 나이로 자결, 순국하였던 것이다.
○ 이러한 순국투쟁은 일제 침략에 대한 강력한 투쟁방략의 하나로 의열투쟁이 자리잡는 계기였다. 나아가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과 구국 계몽운동이 발흥하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후세에게 죽음으로서라도 조국과 민족의 독립은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준 것이다.
○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11월 한 달간 전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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