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독립운동가} 남상덕(南相悳) 선생 (1881. ∼1907. 8. 1)
『8월의 독립운동가} 남상덕(南相悳) 선생 (1881. ∼1907. 8. 1)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남상덕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881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선생은 한말 대한제국 군대에 입대하였다. 일제의 무력 침략과 식민지화 책동에 대항하여 조국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후 대한제국 육군 보병 견습 참위로 중앙 시위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시위대는 서울의 방위와 황실의 호위를 맡은 대한제국 정예부대였기 때문에 조국과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
그러던 중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이 빌미가 되어 그해 7월 20일 광무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시위대 병사들은 서울 시민들과 합세하여 일본 군경을 공격함으로써 불굴의 충성심을 표출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을 획책하였다. 한국 식민지화의 최대 걸림돌로 인식하던 광무황제를 퇴위시키고, 이어 민족의 최후 보루인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을 감행한 것이다.
그를 위한 침략 조약이 바로 1907년 7월 24일 강제 체결된 [정미7조약]이었다.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조약]이 대한제국 정부의 자주적 외교권을 강탈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는 내정을 장악하고 군대를 해산하기 위한 것이었다.
8월 1일 일제는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을 강행하였다. 도수체조를 실시한다는 명목 아래 시위대 장병들을 비무장으로 훈련원에 집합시켰다. 군대 해산식을 거행하려는 얕은 꾀였다.
이날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일제의 술책을 간파하고 병을 핑계로 군대 해산식에 불참하였다.
그런 뒤 권총으로 자결함으로써 군대 해산에 대한 반대의 뜻을 강력히 분출하고, 무언의 공격 명령을 내렸다.
시위 제2연대 제1대대에 근무하던 선생은 박승환 참령의 자결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였다. 그리하여 "윗 장교가 나라를 위해 죽음으로 의로움을 보였는데 내가 어찌 홀로 살기를 바라겠는가? 마땅히 저 적들과 결사 항전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자"고 외쳤다.
이어 부하 병사들을 이끌고 남대문 근처에서 일본군과 격렬한 시가전을 전개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27살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지만, 그 뜻은 대한제국 병사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계승됨으로써 의병운동을 국민전쟁으로 확대 발전시켰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8월 한 달간 전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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