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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설화

열리지 않는 은행나무

출처
옛날 옛적에 인천은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3386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숭상되는 바람에 불교는 상대적으로 많은 피해와 푸대접을 받았다. 성곽을 쌓거나 다리를 놓을 때 스님들이 동원되기도 했고, 심지어 임금이 살고 있는 서울에 스님들의 출입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사찰로 하여금 그 지역의 특산물을 나라에 바치도록 했다.
강화도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전등사는, 우리 나라 시조인 단군 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안에 포근히 자리 잡고 있다. 이 절에는 대웅전(보물 제 178호), 약사전(보물 제 179호), 그리고 중국 종인 범종(보물 제 393호) 등 세 점의 보물 외에도 볼 것이 많다.
관광객들은 느긋한 마음으로 이런 것들을 모두 둘러 본 다음, 대웅전 아래의 커다란 은행나무 밑에서 잠시 쉬곤 한다.
이 은행나무에는, 원래 많을 때는 열 가마 정도의 열매가 열렸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강화도에 마음씨 고약한 새 원님이 부임했다. 그가 오자마자 한 일은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보살핀 것이아니라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새로운 세금을 매긴 것이었다.
어느 날 전등사를 찾은 원님이 이곳저곳을 살피던 중, 은행나무 를 보자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저 은행나무에서는 어느 정도의 열매가 열립니까?”
이미 원님의 나쁜 성질을 알고 있던 스님이었지만 거짓말만큼은 할 수가 없어 사실대로 말했다.
“예, 많을 때는 열 가마 정도 열립니다.”
그러나 관청으로 돌아간 원님은 스님이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전등사로 하여금 매년 스무 가마의 은행 열매를 세금으로 내도록 했다. 풍년이 들어야 열가마 정도를 수확하는데 평소 때도 그 두 배나 되는 것을 세금으로 내려니 스님들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고민고민하다가 전등사 스님들은 회의를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여러 가지 방안이 나왔다.
“고을 원님을 찾아가 사정대로 말씀드리고 세금을 깎아 달라고 사정합시다.”
“은행이 많이 열리도록 부처님께 예불을 올려 기원합시다.”
“아닙니다. 새로 온 원님은 원래 성격이 고약하여 우리의 사정을 들어 준다 해도 다음에는 더욱 많은 것을 요구할 사람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은행 열매가 하나도 열리지 않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예불을 올립시다.”
오랜 회의 끝에 스님들은 결론을 내렸다.
“만약 이번에 다른 곳에서 은행을 사서 스무 가마를 만들어 낸다고 하면 다음 해에도 더욱 많은 은행을 요구할 것 같습니다. 차라리 열매를 맺지 않도록 부처님께 기원하기로 합시다.”
곧 은행나무 앞에 제단이 만들어지고 전등사의 모든 스님들이 모였다. 이 소식을 들은 주위의 많은 주민들이 손에 손에 제물을 들고 모여들었다. 그들도 평소 원님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 드신 스님 한 사람이 엄숙한 모습으로 앞으로 나섰다. 때그르르 때그르르 목탁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간절한 목소리로 염불이 시작되었다.
모든 스님과 주민들이 정성스럽게 두 손을 모은 채,“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하며 계속 염불을 외웠다.
한나절 동안 계속 된 제사가 끝나갈 때쯤이었다. 갑자기 맑던 하늘에 구름이 끼면서 벼락과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평안한 모습이었다.
다음 해 가을, 스님과 주민들의 정성이 하늘에 통했는지 전등사의 은행나무는 한 알의 열매도 맺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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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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