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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설화

똥 껍질 벗길 이야기

출처
옛날 옛적에 인천은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2201
강화도는 다른 섬에 비하여 논이 꽤나 많은 편이다. 그러나 강화도의 그 넓은 논이란 것이 처음부터 오늘의 모습은 아니었다. 7백여 년 전부터 간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7백여 년 전, 몽골 군대의 침략에 맞선 고려 정부가 강화도로 임시 수도를 옮긴다. 이때 나라에서는 백성들에게 산성이나 인근섬으로 들어가 적군과 싸울 것을 당부했다. 그리하여 왕족과 군인들뿐만 아니라 개경과 인근 경기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강화도로 피난을 왔다.
강화도는 갑자기 불어난 그들로 인해 큰 고민에 빠졌다. 그들이 먹을 식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굶어 죽은 사람의 시체가 길가에 나뒹굴고 있다는 당시의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몽골 군대 때문에 육지로 나갈 수 없는 고려 정부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간척 사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강화도는 여러 개의 섬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해안선의 굴곡 또한 매우 심했다. 그 굴곡은 대부분 갯벌로 이루어져 있었다. 갯벌은 물이 빠지면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물 깊이가 얕은 곳이었으므로 이곳을 메워 논으로 만든 다음 식량을 생산하기로 한 것이었다.
고종 22년(1235),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일찍, 그리고 체계적으로 대규모의 간척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후 간척 사업은 계속되어 조선 시대와 근대까지 계속되었다. 조선 시대 당시 외적의 침략이 있을 경우 강화도는 정부의 피난처로 주목을 받았다. 이때 강화도에서 군량미를 준비할 목적으로 간척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비상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항상 많은 쌀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 중 대규모의 간척 사업이 화도면과 강화 본도를 잇는 선두포 둑을 만드는 사업이었다.
마니산 참성단이 있는 화도면은 이 간척 사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강화도에서 떨어진 고가도라는 섬이었다.
조선 숙종(1706)때 만들어진 이 선두포 둑은 길이 약 500미터로 연인원 11만 명이 동원된 대규모의 공사였다. 당시 이러한 대공사는 모두 사람들의 노동력으로 해결해야 하는 매우 힘든 것이었다. 따라서 공사가 힘든 만큼 인부들 중에는 꾀를 부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아프다거나 대변을 보러 간다는 핑계를 댔다.
하루는 공사 감독이 몰래 그들을 따라가 보았다. 거기에는 담배를 피우며 노는 사람, 아예 낮잠을 자는 사람 등 여러 사람이 감독의 눈을 피해 쉬고 있었다. 인부들에 대한 감독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고 일은 더욱 고달퍼졌다. 그 중에 유난히 꾀가 많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매일 두 번, 세 번씩 대변 핑계를 댔다. 왼손은
배에 오른손은 엉덩이에 그리고 얼굴은 잔뜩 찡그린 채 똥마려운 사람의 걸음걸이로 공사 감독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오늘 아침 먹은 것이 잘못된 모양입니다.”
“아니, 자네는 오전에도 대변을 보러 갔지 않았나?”
“네 감독님, 그런데 또 배가 이상합니다.”
평소 그를 의심하던 감독은 드디어 그의 뒤를 밟아 보기로 했다. 담배를 피우며 놀고 있을 것이라는 감독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바지를 내리고 대변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서로 눈이 마주쳤고 감독은 멋쩍은 얼굴로 다시 현장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그 꾀 많은 사람은 씨익 웃으며 혼자 말을 했다.
“이 힘든 일을 어떻게 하라는 대로 다 할 수 있어. 감독, 당신도 내 머리는 따라올 수 없지.”
사실 그는 대변이 마렵지 않았다. 그는 남이 보아 놓은 대변의 얇은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바지를 내리고 대변 보는 자세로 앉아만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감독은 정말 대변을 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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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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