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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설화

왕이 아들을 기다리던 견자산

출처
옛날 옛적에 인천은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1633
강화읍에는 견자산이라는 산이 하나 있다. 이곳에는 충혼탑이 있고, 매년 현충일 6월 6일이면 많은 뜻 있는 분들과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 분들의 고귀한 뜻을 기린다.
현재는 견자산-충혼탑-나라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7백여 년 전 이미 이 산은 한 임금이 나라의 힘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던 산이었다.
13세기 초, 세계 제국을 이루려는 몽골 군대의 침략에 맞서 고려의 고종 임금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다. 그리고 내성, 중성, 외성 등 3중의 성곽을 쌓으면서 하루 빨리 몽골 군대를 쳐부수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갈 날을 기대했다. 그러나 전쟁은 예상 외로 길어졌고 육지에 있는 고려 백성들은 몽골군의 만행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더구나 몽골군의 제6차 침입 때(1254)는 고려 백성 26만 명 이상이 몽골 군대에 인질로 끌려가고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강화도의 고종 임금은 더 이상 육지 백성들의 고통을 두고 볼 수 없어 몽골 군대와 회담을 하기로 했다.
어느 날 몽골의 사신과 고려의 사신이 만났다. 몽골 군대가 고려정부에 요구한 것은 첫째, 강화도의 고려 정부는 빨리 개경으로 나올 것. 둘째, 고려의 왕이 원나라에 들어와 원(元)의 황제에게 인사 드릴 것이었다. 쉽게 말해 빨리 육지로 나와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고종 임금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지만 고통 당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생각해 그들의 조건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여러 차례의 회담 끝에 우선 고려의 임금 대신 왕자가 원나라 황제에게 인사를 하러 가기로 약속했다. 처음에는 임금의 먼 친척 중에서 사람을 골라 원나라로 보냈으나 나중에는 왕의 친아들 안경공 창(淐)을 보내야 했다.
살아온다는 보장도 없이 아들을 머나먼 적국으로 보낸다 생각하니 고종의 마음은 여간 아픈 것이 아니었다. 고종은 밤잠을 설치는 날이 잦아졌다.
“아! 가슴이 답답하구나. 여봐라, 인근 정자산으로 바람을 쐬러 갈 터이니 준비를 하거라.”
고종은 신하들과 함께 궁궐을 나와 인근의 산으로 올랐다. 이곳은 정자가 있어 정자산으로 불리고 있었다. 임금은 정자에 앉아 북쪽을 바라보며 적국으로 떠난 아들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옆의 신하에게 말을 했다.
“참 이상하구나. 궁궐에서는 아무리 왕자를 생각해도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데 이 산에만 오르면 왕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타나는구나.”
그 후부터 임금은 아들이 생각날 때마다 정자산으로 올라 북쪽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임금의 정자산 행차는 백성들에게는 커다란 구경거리였다. 그럴 때마다 백성들은 먼 발치에 서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을 하곤 했다.
“오늘도 임금님께서 행차하시나 본데, 정자산으로 가시는 거겠지?”
“정자산에 올라 왕자님 생각을 하면, 그의 얼굴이 잘 떠오른다고 해서 산에 오르신대요.”
“임금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정자산 주위 동네의 사람들은 임금의 행차만 보면 자연스럽게,
“아, 임금님이 또 아드님을 보러 산으로 가시는구나.”하고 말했다.
이리하여 정자가 있어 정자산이라 불리던 이 산의 이름이 아들을 본다는 뜻으로 ‘볼 견(見)’, ‘아들 자(子)’자를 써서 견자산(見子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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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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