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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설화

연개소문의 고향은 강화도

출처
옛날 옛적에 인천은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4927
강화도에는 강도삼기(江都三奇)라 하여 세 가지 기이한 것이 있다. 효종 임금을 울린 말 벌대총, 바다에서 건져 올린 보문사의 석불, 그리고 강화도에서 출생한 연개소문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 공원 입구에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하는 커다란 비석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유적비’가 고려산을 바라보며 서 있다. 대막리지란 고구려 시대의 관직이다.
실질적으로 나라의 거의 모든 권력을 지닌 왕 다음 가는 자리였다. 이 비석의 내용은 이렇다.

“개국의 성역이자 선사 시대의 유적지인 이곳 강화는 천하 통일의 큰 뜻을 품었던 고구려의 명장 연개소문(?~665)의 연고지이다. 향토사『강도지』에 따르면 그는 강화도 고려산 기슭에서 태어나, 치마대와 오정(五井)에서 무예를 갈고 닦았으며, 위엄 어린 얼굴에 당당한 풍채는 뭇 사람을 압도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는 그가 출생하였다는 옛터와 자취가 남아 있다.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당(唐)을 정벌하고 한민족의 얼을 드높일 것을 주장한 연개소문은 큰 꿈의 나래를 펼치고자 보장왕을 왕으로 세 우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나라 정치를 바로잡았다. 그때 당 태종이 연개소문의 집권을 응징한다는 구실로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군(軍)과 민(民)이 하나가 되어 요수(遼水)와 안시성(安市城)에서 크게 싸워 당(唐)의 함선 4백여 척과 30만 대군을 쳐부수었다.
특히 안시성 싸움에서 당 태종은 눈에 화살을 맞고 도망쳤다. 연개소문은 승전의 기세를 몰아 당나라 내륙으로 깊숙이 밀고 들어가 화북(華北)지방을 정벌하고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영걸(英傑)이었다.
이 사실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숭조회에서 비석을 세우다. 1993년”

연개소문의 탄생과 성장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아직 발견된 것이 없다. 다만 강화도의 향토사지인『속수증보강도지』에 “연개소문은 고려산 밑에서 출생하였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은 물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대중을 현혹시켰다.”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곳의 전설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고려산의 우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의 성도 ‘못 연(淵)’으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근처에는 연개소문이 무술을 연마하기 위해 말을 타고 달렸다는 치마대(馳馬臺),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5개의 우물[五井], 그리고
집터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민간인들의 접근이 어려운 상황이다.
『삼국사기』의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은 극히 적고 이 또한 대단히 좋지 않은 것뿐이다. 즉, 임금을 죽인 잔악 무도하고 포악한 신하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라의 후예인 김부식이 신라를 정통으로 만들기 위해 신라와 끝까지 적대 관계에 있던 고구려의 역사를 일부러 좋지 않게 꾸며 놓은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많이 달라졌다. 구한말 언론인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위대한 혁명가 연개소문으로, 독립운동가였던 백암 박은식(1859~1926)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탁월한 전략가요, 나라를 구한 영웅 연개소문으로 평가하고 있다.
뒷날, 어느 시인은 이런 글을 남겼다.

고려산 소나무는 얽히고설키었는데
일찍이 이곳은 호걸이 말 타고 놀았었다고
풍우같이 말을 몰아 요동벌을 진동하였다니
아직도 막리지 개소문의 전설이 남아 있네
<봉촌(鳳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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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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