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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설화

마을이 사라지고 생긴 청주펄

출처
옛날 옛적에 인천은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1423
강화도에 딸린 또 하나의 섬 교동도는 원래 3개의 섬으로 이루어졌었다. 화개산, 수정산, 율두산 3개가 그 섬의 중심이었다. 그러다가 고려 때 강화도가 임시 수도가 되면서(1232~1270) 식량확보를 위한 간척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는 조선 시대에 와서도 계속되었고 많은 갯벌과 섬들이 그때 메워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교동도가 되었다.
교동도에는 지금도 간척을 한 흔적이 남아 있다. 논 가운데에서 조개 껍질이 발견된다고 해서 이름지어진‘조개맨들’이 그 한 예다. 그리고 아직도 곳곳에 갯벌이 조금 남아 있다. 그 중 한 곳이 청주펄이다.
교동도에는 바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주(貞州)라는 마을이 있었다. 다른 곳에 비해 기름진 땅이 많고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의 생활은 이웃의 손가락질을 받을 만큼 사치스러웠다. 이웃 동네와 연결되는 새로운 다리를 흙이나 돌,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청동(靑銅)으로 만들어 건너 다닐 정도였다. 그리고 화롯불이 쉽게 꺼지지 않게 불씨를 눌러 두는 불돌을 다른 집처럼 돌 조각이나 기와 조각을 사용하지 않고 찰떡을 이용했다. 당시 찰떡은 명절이나 집안 잔치같은 특별한 날에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사치도 사치려니와 이 마을 사람들의 인심은 고약하기로도 소문이 나 있었다. 먹다 남은 밥도 버리면 버렸지 절대로 남을 주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길을 가던 스님이 시주를 부탁해도 시주는 고사하고 공연한 욕설을 하며 스님을 쫓아 버렸다.
어느 날 길을 지나던 한 노스님이 이 마을 큰 기와집 앞에서 목탁을 치며 시주를 부탁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런데, 여느 날과 달리 기와집의 부인이 공손하게 말했다.
“스님, 공양미를 드릴 테니 바가지를 이리 주세요.”
스님은 감사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으고 바가지를 부인에게 건넸다. 그런데 갑자기 부인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 늙은 중놈아, 할 일 없으면 땅이나 갈아서 먹을 것을 구할 일이지 허구한 날 거지와 같이 왜 남의 집을 기웃거리고 다니는거야?”
부인은 스님의 바가지를 힘껏 땅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깨어진 바가지를 다시 두 발로 짓밟았다. 곁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그 집 아이들도 재미있다는 듯 돌을 집어들어 스님을 향해 던졌다.
“얼레리 꼴레리. 거지 중놈.”
스님은 아무 말 없이 대문을 나서며 혼자 말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당신들이 여태까지 잘산 것이 누구의 덕이었는데 두고 봅시다.”
며칠 후 맑고 푸르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늘을 뒤흔드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우루루 쾅, 우루루 쾅 쾅.”
하늘에서 퍼붓듯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모두 정신 나간 사람 같았다.
반나절 후 거짓말 같이 비가 그쳤다. 그런데 정주 마을은 완전히 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물론 마을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마을 전체가 사라지고 갯벌로 변한 것이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은 정주 마을의 인심이 고약해 하늘이 벌을 내렸고 그래서 갯벌로 변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사라진 정주 마을을 정주펄로 불렀고 요즘은 청주펄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옛날에 청동 다리가 놓였던 자리에선 지금도 가끔 덜커덩 덜커덩 하는 쇳소리가 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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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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