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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설화

사모 바위와 족두리 바위

출처
옛날 옛적에 인천은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1615
옛날 강화도의 혈구산(穴口山) 밑에 강씨 성을 가진 한 양반이 살고 있었다. 그 집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얼굴도 잘 생겼을 뿐 아니라 총명하여 다섯 살 때 이미 천자문을 다 외웠다. 그 집안에서는 이 아이가 자라면 반드시 큰 인물이 되어 집안을 일으킬 것이라며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강 도령이 나이 열 다섯이 되던 어느 날 우연히 부모님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여보, 우리 아이도 이젠 장가 보낼 때가 되었는데 어디 좋은 규수가 없는지요?”
“그렇지 않아도 한양의 김 대감 집에서 연락이 온 적이 있었소. 내가 알기로도 그 쪽은 집안이나 규수도 나무랄 데가 없으니 조만간 내가 한번 한양에 다녀올 작정이오.”
강 도령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눈앞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강 도령이 사는 마을 근처에 비록 살림은 어렵지만 선량하게 살아가는 박씨 부부가 있었다. 그 집의 외동딸이 마음씨가 착할 뿐 아니라 얼굴도 아름다워 동네에서도 일등 신부감으로 칭찬이 자자했다.
몇 달 전 강 도령이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박씨의 딸을 보았다. 강 도령
은 순간‘아! 저 처녀야말로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천생배필이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날 이후 강도령은 하루도 박씨의 딸을 잊은 적이 없었고 가끔은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박씨 딸의 강 도령에 대한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잘 생긴 외모에 뛰어난 글재주, 거기에다 의젓한 몸가짐으로 가끔 길에서 강도령을 만날 때마다 박씨의 딸은 눈을 어디 둘 줄 몰라 몹시 당황하곤 했다.
곧 부모 몰래 그들의 만남이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만남의 횟수가 잦아지는 만큼 그들의 사랑은 깊어 갔고 드디어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제는 두 집안의 차이였다.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의 강도령 집안과 남의 집 논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어려운 살림살이의 박씨 집안은 당시로서는 혼인이 이루어질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 도령의 부모님이 한양의 김 대감 집안과 혼담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양쪽 집안의 혼담이 깊어 갈수록 강도령의 고민은 점점 커져 갔다. 책을 펼쳐 놓아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밥맛까지 없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강 도령이 병이 나 자리에 눕고 말았다. 사정을 모르는 부모님은 용하다는 의원들을 부르고 갖은 약을 다 써 보았다. 그러나 전혀 차도가 없고 병은 점점 깊어만 갔다. 몇 달 후 강 도령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편 강 도령의 소식을 들은 박씨의 딸 역시 병이 났다. 그리고 눈이 많이 오던 어느 날 그녀는 집을 나갔다. 그 후 그녀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훗날 혈구산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생겼는데 그 모습이 사모관대를 한 신랑의 모습과 같았다. 사람들은 강 도령의 혼이 바위로 다시 태어났다 하여 사모 바위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삼동암리 덕정산 쪽에도 족두리를 쓴 각시의 모습과 같은 바위가 하나 생겼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족두리 바위라 불렀다.
이 두 바위는 멀리 떨어져 서로 마주보며 서 있다. 그리고 한 겨울 첫 눈이 오는 날 두 바위는 사모 관대를 한 신랑과 족두리를 쓴 각시로 변해서 중간 지점으로 와서 만난다. 그리고 밤새도록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다음 날 아침 두 바위는 내년 첫눈이 올 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두 바위가 만나던 장소는 평평한 넓은 터로 흔히 장자터라고 알려져 있으며 옛날에는 군사 훈련장으로도 쓰였다고 전해 온다. 지금은 과수원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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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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