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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설화

항기와 약효가 뛰어났다는 석천 사거리 돌우물

출처
옛날 옛적에 인천은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4152
우리가 흔히 부르는 석천 사거리는 인천시청 후문 언덕길에서 간석동 방향으로 내려오다 보면 나온다. 이 지점이 구월동과 간석동의 경계가 되는 곳으로 건너편 모서리에 석천초등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석천(石泉)이란 글자 그대로‘돌샘’또는‘돌우물’이라는 뜻인데, 옛날 이곳에는 물에서 향기가 나는 돌우물이 있었고, 이 때문에 이 근처 마을을 돌샘마을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돌우물은 옛날 주안산으로 불리던, 만월산 서쪽 기슭에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석천 사거리 부근일 터이지만, 그 실제 위치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전설에는 이 샘물은 아주 좋은 향기가 날 뿐만 아니라 몸에 생긴 종기나 눈병 같은 데에 특히 효험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이 소문이 나중에는 조정에까지 전해져 세종 임금이 이곳에 사람을 보내 물맛과 향기, 약효 등을 자세히 조사하도록 한 일도 있었다. 세종은 몸이 약한 데다가 종기와 안질을 앓고 있어서 늘 좋은 물이나 온천을 찾았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세종조에,
“경기도 관찰사 허후(許詡)가‘인천군 북쪽 돌 가운데에 작은 샘이 있는데 약간 향기가 있고 윤기가 있기가 보통 물과 다르므로 그 동리 사람들에게 물으니 이 물이 안질을 고치고 또 종기를 고친다고 하오니 그 고을 수령을 시켜서 다시 샘물의 빛깔과 맛이며 또 수원(水源)의 얕고 깊은 것을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소서’하니 살펴보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세종이 이곳에서 온천 찾기에 성공했다거나 약효가 있는 샘물을 발견했다는 기록은 없다. 세종 때 부평 일대에서 여러차례 온천을 찾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아마 그 온천을 찾는 과정에서 이곳 석천 일대에 대한 조사도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세종이 부평 일대에서 온천을 찾게 된 연유는 그보다 더 전의 옛 기록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그랬던 것으로, 그렇다면 ‘석천’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된 그 향기 나는 돌우물이 실제로 있었다고 해도, 이미 세종대 무렵에는 없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참고로 석천이라는 지명과 관련한 부평의 온천 이야기를 하면 다음과 같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한쪽 다리가 불편하였고, 등에는 부스럼까지 있었다. 또 독서를 좋아하여 밤낮으로 책을 읽었기 때문에 시력까지 몹시 쇠약해졌다. 효험을 본 것은 대신들의 권유로 온양 온천에 가서 목욕을 한 후였다.
온천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세종은 서울 가까운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온천 탐색을 명했다. 그런데 온천이 있다는 장소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분명하지 않았다. 이조참판 조서강(趙瑞康)은 부평의 관사, 민가로부터 전원(田園)에 이르기까지 온천이 있었다는 곳은 모조리 파 보았다. 세종 21년(1439)에는 이사맹(李師孟)을 경차관으로 임명하여 온천을 탐색토록 했으나 이 또한 끝내 허사였다.
세종 22년 8월 세종은 명하기를,
“부평현의 관리나 백성들이 민폐를 우려하여 서로 숨기고 고하지 아니하니 심히 유감된 일이다. 금년 연말까지 기한을 줄 것이니 그때까지 고하지 아니하면 관원은 다른 지역으로 귀양 보낼 것이고, 여러 대 거주한 백성이라도 자기 집터나 논밭에 온천이 있음을 고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타향으로 내쫓을 것이며 누구든지 온천을 감춘 일을 고한 자는 상을 주게 하라.”고 했다.
이처럼 온천 탐색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세종 25년(1443) 7월 온천 발견에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는 함경도로 귀양 보냈던 관리를 귀환시키고, 온천을 숨겼다는 죄목으로 현으로 강등했던 부평을 도호부로 환원하게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20년이 지난 세조 13년(1467년) 부평 남급(南級)의 집에 온천이 있다는 제보를 듣고 부왕 세종의 염원을 풀어드릴 좋은 기회로 생각한 세조가 신숙주 등을 부평에 파견하여 조사하도록 했는데 이 또한 허사였다. 『부평부읍지』에도 언제 온천이 어디에 있었고 언제 왜 없어졌다는 말은 없다. 이것이 부평 온천에 관련한 소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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