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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설화

존장의 사과를 받은 여섯 살짜리 제운 선생

출처
옛날 옛적에 인천은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2704
남구 학익동은 예로부터 제운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는데 그것은 조선 숙종 때 교육자로서, 또 효행자로서 높이 칭송을 받는 이세주가 이곳 학익동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호가 제운이었기 때문이다. 이세주는 부평 이씨지만 그의 명성이 너무 유명해서 아호가 곧 본관처럼 쓰일 정도였다. 심지어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부평 이씨를 제운 이씨라고까지 부르기도 했다.
이세주가 겨우 여섯 살이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외삼촌의 존장되는 어른이 이세주가 있는 자리에서 아버지 이진재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 그러자 이세주는 울면서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아니, 예 세주야, 너 무슨 일로 우느냐? 무슨 일인데 사내 아이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눈물을 보이는 것이냐?”
세주의 눈물을 본 집안의 한 어른이 무슨 일인가 하여 물었다. 
“다른 일이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 어른의 함자(銜字, 이름)는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온데, 존장 어른께서는 아버님의 함자를 바로 제 앞에서 마구 부르시니 몸 둘 바를 몰라서 그러한 것입니다.”
“어허, 어린 네가 진정 예를 아는구나.”
그리고 나서 세주는 다시 그 존장에게 가지 않았다. 
당시는 웃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이 예법이었다. 그것은 특히 유학을 숭상하는 선비의 집안에서는 더욱 엄격히 지켜야 할 규칙이었다. 불과 여섯 살짜리 소년 이세주가 그것을 지킨 것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그 존장은 크게 실수를 뉘우치고 어린 세주에게 찾아와 사과했다.
“오, 이런 내가 네게 큰 허물을 면치 못하게 되었구나. 다시는 내 그리하지 않을 터인즉, 어서 노여움을 풀어라. 그리고 원컨대 훗날 반드시 대성해서 이 나라의 큰 선비가 되어라.”
이 사실이 이웃에 알려지자 모두 혀를 내두르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언제나 즐겁게 웃고 재롱을 부리면서 부모의 마음을 언짢게 하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아우나 누이에게 또한 지극한 사랑을 베풀어 혹 어쩌다 병이라도 앓게 되면 이만저만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번은 어머니가 학질을 앓았다. 어머니를 진맥한 한의는, “다른 약도 약이지만 백일 동안 매일같이 참새를 5, 6마리씩 먹어야 낳을 것이오.”
“그렇다면 참새를 잡는 일은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어린 세주는 그날부터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마다하지 않고 하루도 빠짐없이 참새를 잡아 어머니가 잡숫게 했다는 것이다. 그의 효성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얼마나 극진했던지 어머니가 거처하시는 방은 반드시 자신이 불을 지펴 따듯하게 했고 비록 가세는 가난했으나 부모 봉양에 조금도 빠진 것이 없도록 했다.
겨울에는 어머니의 잠옷을 미리 입어 따듯하게 한 뒤 입으시도록 했고, 여름에는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부채질을 해 드렸다. 어머니가 84세의 고령으로 병세가 위중해지자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고 간호하며 심지어 어머니의 변을 맛보아 병세를 판별하면서까지 간호하여 세상 사람들의 흠모와 감탄을 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는 또 훗날 늙어서 자식도 없이 일찍 과부가 된 누이동생을 위하여 자기 집 옆에 거처를 마련해 주고 직접 돌보는 한편 양자를 들여 친자식처럼 아끼고 가르치기도 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러한 제운 선생의 일생을 효행과 교육의 표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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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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