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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설화

여인으로 변장한 장사 박창보

출처
옛날 옛적에 인천은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2730
지금의 남동구 간석동에 박창보라는 장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원래 포수였는데 워낙 힘이 센 장사인 데다가 담력도 크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당시 간석동 일대는 숲이 울창했는데 그 숲을 악명이 높은 도둑의 무리가 은신처로 삼고 있었다는 것이다. 워낙 사납기로 이름난 도적단이어서 관가에서조차 선뜻 토벌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설령 도둑 몇 명을 잡았다 해도 감히 처형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뒤 곧이어 닥칠 나머지 도적 떼들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형편이 그러하니 백성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관가의 체면이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런 소문을 전해 들은 박창보는 자진해서 관가로 가 자신이 그 도둑들을 토벌하겠노라고 공언한 것이었다. 관가에서는 박창보가 세상에서 알아 주는 장사인 데다가 그 자신이 스스로 도둑 토벌을 약속하니 여간 기쁘고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약속을 하고 얼마 후 과연 박창보는 그 도둑 떼 괴수의 목을 벨 수 있었다. 그러나 괴수가 박창보의 손에 처형 당하자, 아 니나 다를까 그날 밤으로 도둑의 무리들이 박창보의 집으로 쳐들
어 온 것이었다. 박창보의 집안 사람들은 저 도둑 무리들의 손에 보복을 당하는구나 하고 모두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제 영락없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박창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측했던 것이다. 그의 강한 담력만큼이나 놀랄만한 꾀하나를 박창보는 생각해 냈다. 부인으로 하여금 여자 치마저고리를 가져오게 하여 갈아입고 여인으로 변장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썩 밖으로 나와 쇠도리깨를 들고는 집을 둘러싼 도둑의 무리들을 맞아 닥치는 대로 마구 휘둘렀다.
억센 힘으로 휘두르는 박 장사의 쇠도리깨를 맞고 어느 누가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순식간에 도둑 몇이 땅바닥에 나동그라지는 것이었다. 도둑들은 기가 막혔다. 남자도 아닌 여자가 휘두르는 쇠도리깨에 맞아 몇 명이 힘 한 번 쓰지도 못하고 한꺼번에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 놈의 집은 여편네까지도 산삼을 삶아 먹었는지 모두 장사로구나. 그대로 싸우다가 온 가족이 나와 덤비면 오히려 우리가 위험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도둑들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을 치고 말았다.
나중에 보니 이 싸움에서 도리깨에 맞아 죽어 나동그라진 도둑이 열 명도 더 되었다. 이렇게 혼이 나 도망친 도둑들은 크게 겁을 먹고는 다시는 박창보의 집으로 쳐들어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모두가 이리저리 흩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박창보의 이야기는 그 후 임오군란 때에도 전해진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일본 공사 화방의질(花房義質)과 그를 따르는 병사 무리가 함께 서울로부터 문학동으로 도망치던 때였다.
그때 장자골에 살던 최춘택이란 사람이 이들 왜병의 총 열다섯 자루를 빼앗았는데 왜병들이 그 최춘택을 잡기 위해 뒤를 쫓고 있었다. 마침 그때 이 광경을 본 장사 박창보가 비호같이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올라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기왓장을 걷어서 왜병들을 향해 던졌다. 이 난데없는 기왓장 공격을 받자 왜병들은 기겁을 하고는 더 이상 최춘택을 추격하지 못하고 되돌아가 제물포를 통해 본국으로 도망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박창보 장사에 관한 이 이야기들은 구한말 고종 때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데 그의 후손들은 얼마 전까지도 만수동 샛골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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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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