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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설화

계양산은 강서의 진산

출처
옛날 옛적에 인천은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3475
계양산은 해발 395미터로 인천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수주악, 안남산, 아남산, 노적봉, 환여금, 용장자산 등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규보가 지은 『망해지』에는 산정에 올라가 보면 삼면이 모두 물이라고 했다. 남쪽 부평 평야는 바닷물과 한강물이 혼합되어 드나들고 서쪽은 서해가 있고 동쪽은 한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계양산은 부평과 서곶과 계양 사람들의 정신적 고향이다. 세 지역 사람들은 각각 이 산이 자기 고장 산이라고 말하며, 타국이나 타향에 머물 때도 고향이 그리울 때면 이 산을 떠올린다.
이 산은 멀리서 떠돌아왔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바다에서 떠올랐다는 전설도 있다. 옛날에 부평 평야는 바닷물과 강물이 혼합되어 드나드는 간사지였다. 계양산의 한 줄기는 북으로 뻗어가 거의 한강에 이르는데, 한강은 그 주위를 둥글게 휘어감아 흐르면서 서해로 흐르니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런 전설이 생긴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강화 마니산의 반조각이 갈라져서 떠돌아왔다는 전설도 있다. 그래서 마니산을 형산, 계양산을 아우산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계양산의 이름은 계수나무와 회양목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계수나무는 열대 수목이니 잘못된 말이다. 회양목은 계양산에 매우 많았다.
고려 시대에 부평 일대를 관장하는 행정 관청의 명칭을 계양도호부로 붙이고 그것이 일제 때 부천군 계양면으로까지 이어 오면서 대표성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0~50년 전만 해도 안남산이라는 지명을 많이 썼다. 사람들은 “안남산 불여우 같은 녀석.”이라든지, “포수들이 안남산에서 노루를 세 마리나 잡았다.”라든지, “안남산으로 도롱뇽 알 찾아 먹으러 가세.”하는 식으로 이름을 사용했다.
계양산에는 세 개의 큰 봉우리가 있는데 제일 큰 봉우리를 군자봉 또는 명장군봉이라 부르고, 그 봉우리와 나란히 선 것을 옥녀봉이라 부른다. 두 봉오리와 조금 떨어져 있는 봉우리를 꽃뫼봉이라 부른다. 그런 봉우리들 이름 때문인지 옛사람들은 이곳을 비범하고 용감한 장군이 아름다운 미녀(옥녀)와 더불어 꽃밭에서 노니는 명승지라고 여겨왔다.
계양산은 삼국 시대에 중국으로 통하는 큰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서 삼국 시대에 이미 민가 5백여 호가 있었다. 특히 고려 시대에는 삼남 지방과 왕도 개성을 잇는 중요한 통로였다.
그리고 조선 왕조의 건국 이후 서곶에서 계양산을 넘어가는 큰 고갯길인 경명현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 고갯길이 물론 이때 새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삼국 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이지만 관아가 있는 부평을 거쳐 서울로 가는 가장 가까운 교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고개에는 도둑 떼가 끊이지 않았다.
계양산은 옛날에 도둑 떼가 활동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인천과 부평 일대에서 가장 높고 깊은 산이며, 아름드리 수목이 우거져 은신하기가 좋고, 산의 동서남북 아래에는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부자들한테서 빼앗을 것이 많았다. 게다가 산의 허리에 걸쳐진 경명현은 서울로 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 고개는 삼국 시대 이래로 개성과 인천, 안산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으며 길이가 8킬로미터에 달했다. 그리고 한국 근대 소설의 최고봉이라고 부르는 홍명희의 대하 소설『임꺽정』에도 나온다.
서곶초등학교가 개교하기 전, 서곶의 학동들은 계양산 반대편 산록 아래 있던 부평소학교(현재의 부평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이 고개를 걸어서 넘어 다녔다.
경명현은 ‘징매고개’, 또는 ‘징맹이 고개’라고도 불렀는데 그 명칭은 고려 때 이곳에 매 사냥을 하기 위한 국영 매방이 있었기 때문에 ‘매를 징발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붙여졌다.‘ 천명고개’라는 이름도 있었는데 그것은 도둑이 많아 천 명이 모여서야 넘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계양산에는 이 경명현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도둑이 끓었다.
계양산이 강서 지역의 가장 저명한 지형 지물이라는 말은 지금도 맞는 말이다. 비행기 조종사들은 김포공항이나 인천공항에 접근하면서 우뚝 솟은 이 산을 보며 방위를 찾는다고 한다.
계양산에는 3~4부 능선에 회양목이 지천으로 많았다. 그것은 전국적으로 유명하여, 마구잡이식 채취가 이루어졌다. 1960년대만 해도 어디서 왔는지 모를 인부들이 수십 명씩 산록으로 올라가 마구 캐서 가마니에 담아 트럭 뒤에 가득 쌓아 올리고 떠나는 것을 수없이 볼 수 있었다.
도롱뇽도 그러했다. 이른 봄이면 수십 명씩 몰려가 맑은 시냇물에 숨듯이 놓인 것을 잡아다가 몸 보신을 했다. 그러나 외지 사람들이 찾아와 마구 채취해 지금은 거의 멸종 단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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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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