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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설화

계양산의 장사굴

출처
옛날 옛적에 인천은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2667

계양산 남록에 장사굴이라고 불리는 작은 굴이 있었다. 입구가 땅바닥에 붙어 있는 데다가 앞에 소나무와 관목들이 무성해서 여간해서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입구가 좁아서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지만 안에 들어서면 바람이 없이 아늑하고 빛도 적당히 들어오고 예닐곱 명이 앉을 수 있었다.
옛날에 사냥꾼 세 사람이 계양산에 올랐다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그곳을 발견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비바람이 전혀 들이치지 않고 그리 컴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방안에 들어온 듯 편안했다.
한 포수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주인이 있네. 여기 포대기와 물그릇과 도기로 만든 잔이 있네.”
그때였다. 빗소리에 섞여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와 발소리가 들려왔다. 사냥꾼들은 여차하면 당길 생각으로 활에 화살을 재었다.
한 사람이 굴 앞에 서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구세요? 허락도 없이 내 집에 들어온 사람들이?”
그 목소리는 앳되게 느껴졌으나 워낙 커서 사냥꾼들은 그가 소년 거인이거나 소년 장사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우리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사냥꾼들이네. 비를 그으려고 들어왔는데 주인이 있는 굴인지는 몰랐네.”
굴의 주인은 끙 소리를 내며 배를 깔고 안으로 들어왔다. 열두 살쯤으로 짐작되나 키가 육척이 넘게 컸으며 온몸이 무쇠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도 사냥을 하며 사는지 몸에는 가죽옷을 걸치고 있었고 막 잡아온 듯 노루 한 마리를 피 묻은 창과 함께 구석에 던졌다.
“행색을 보니 아저씨들은 사냥꾼들인 모양인데 배고파 보이는구려.”
“그렇네. 사흘 동안 거의 먹지 못했네.”
소년 장사는 부싯돌로 불을 일으킨 뒤 잡아온 노루를 쭉쭉 찢어 꼬챙이에 꿰어 구어 권했다.
배고픔을 면한 사냥꾼들이 물었다.
“너는 어떤 연유로 혼자 이 굴속에 살게 되었느냐?”
소년 장사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일곱 살 때 돌아가셨어요.‘ 너는 철룡 장군의 아들이다. 그분은 모함을 받아 돌아가셨다’라고 말하셨어요.”
이날 사냥꾼들이 소년 장사와 대화를 나눈 것이 마지막이었다.
몇 달 뒤에 그들이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는 소년 장사가 머문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 장사가 계양산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근방 사람들은 간혹 소년 장사의 모습을 멀리서 보았던 것이다. 절구 만한 바위를 핑핑 집어던지며 노루를 잡는 모습도 보았고 지름이 한 뼘은 될 나무를 뚝뚝 분지르는 모습도 보았다. 아마도 근처의 다른 굴 속에 사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소년 장사는 어른이 되었을 때 거인처럼 컸으며 바위를 밟았는데 어찌나 무거운지 바위 위에 패인 발자국이 남았다. 그는 어디론가 빠른 걸음으로 걸었는데 땅이 쿵쿵 울리고 놀란 짐승들이 사방에서 뛰었다. 그를 본 이야기는 그것이 끝이었다.
그 장사굴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왜군이 쳐들어오면 부평향교를 더럽힐 것으로 예상되므로 유생들은 향교에 있던 공자를 비롯한 명현들의 명패와 책들을 숨길 곳을 찾게 되었다.
계양산 아래 고현리에 사는 유생이 말했다.
“아주 좋은 곳이 있습니다.”
그는 소년 장사의 전설이 있는 그 장사굴에 가 본 적이 있었다.
그의 말에 따라 유생들은 명패와 책들을 모두 가져다가 거기 모셨다. 그리고 왜란이 끝난 뒤에 다시 꺼내다가 향교에 모셨다. 그때 전국의 향교는 대부분 불에 탔고 명현들의 명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각지의 향교에서 찾아와 그것을 본보기로 삼아 다시 만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무사히 모셨단 말입니까?”
타지에서 온 유생이 물으면 부평 유생들은 손으로 계양산을 가리키며,
“저 계양산에 있는 장사굴이 지켜 주었지요.”
하고 자랑스럽게 대답하곤 했다.
이런 전설을 간직한 장사굴은 1970년대에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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