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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포천과 원통이 고개

작성자
옛날 옛적에 인천은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3554

부평 지역의 중요한 지명으로 남아 있는 굴포천과 원통현은 옛날부터 여러 차례 시도했던 경인 운하 사업과 관련된 이름이다.
굴포천은 좁은 의미로는 옛 부평의 벌말에서부터 한강까지 물이 통하도록 사람의 힘으로 뚫은 하천을 말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이것과 연결된 대교천, 북포, 직포까지 포함하여 옛 운하 사업을 할 때 연결되었던 부평 지역의 하천을 통틀어 말한다.
옛날에는 남부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서울로 운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국가의 사업이었다. 인천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서울까지 가면 매우 편리하지만 강화도와 김포 반도 사이에 흐르는 해협에 있는 손돌목이라는 곳에 소용돌이 급류가 있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조선 중종대왕은 낙심하여 크게 탄식했다.
“또 거기서 세곡선이 침몰했다는 말이오? 버린 곡식이 삼천 석이라니 이를 어쩐단 말이오?”
중신들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국가 재정이 거의 그 세곡에 달렸는데 나라 살림에 큰 주름이 잡히게 되었사옵니다.”
중종대왕은 한숨을 쉬었다.
“나라 살림도 살림이지만 가난한 백성들이 배를 주리며 납부한 세곡을 그렇게 버리니 면목이 없는 일이오. 경들은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으시오.”
그때 권신 김안로가 아뢰었다.
“전하, 한 가지 방법밖에 없사옵니다.”
“그게 무엇이오?”
“그 손돌목을 피해 운하를 파는 것이옵니다. 그러나 고려 때 실패한 것이옵니다.”
“자세히 말해 보오.”
대왕이 말했다.
“고려 시대 최충헌의 아들 최이는 김포 굴포천을 한강과 연락하는 수로를 개척하여 한강물을 서해로 돌리려다가 계양 산맥의 큰 고개 암벽을 뚫지 못하여 실패하고 말았사옵니다.”
신하들은 며칠 동안 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를 보고 받고 중종대왕은 깊이 생각한 끝에 김안로에게 운하를 파라는 왕명을 내렸다.
김안로는 고려 시대에 실패한 곳을 그대로 뚫고 나가려 했다.
그는 한강 입구인 연사정에서부터 출발하여 부평의 굴포천을 깊이 파서 부평 평야를 횡단하여 계양 산맥의 원통현까지 나아가고, 또 한편 번지기 마을(현재의 가좌동)의 갯골 포구에서 시작하여 동암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사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김안로는 감독관에게 호통을 쳤다.
“나라의 경제가 여기 달렸는데 왜 못 판단 말이냐!”
감독관은 무릎을 꿇었다.
“산 전체가 단단한 돌이옵니다.”
김안로는 다시 호통을 쳤다.
“그래도 파라. 돌산을 부수란 말이다.”
그러나 워낙 단단한 돌이라 곡괭이 끝이 번쩍번쩍 불꽃을 내며 튀었다. 횃불을 켜고 수백 명이 한 달이 넘도록 돌산에 달라붙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결국 암벽을 관통하지 못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어.”
김안로는 다른 방향을 찾으려 했다. 현재의 남동구 장수동에 있는 소래 산맥 옆 수월현으로 방향을 돌려 인천 장수천을 깊이 파고자 했으나 이번에는 수월현의 암벽을 뚫지 못하여 실패했다.
“그래도 어딘가 길이 있을 거야.”
그는 세 번째 시도에 나섰다. 이번에는 굴포천에서 헌재의 청천동 청천천과 연결시켜 수로를 깊이 파고 안하지 고개를 우회하면서 가정천으로부터 서해로 운하를 뚫으려 했으나 철마 산맥의 암벽을 뚫지 못하여 실패했다.
김안로는 암벽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왜 저희의 정성을 외면하십니까.”
세 번의 노력이 실패하자 중종 임금은 단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
“참으로 원통한 일이오. 이제는 다른 수송의 방법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는 일이오.”
그래서 경인 운하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런 과정에서 인천에는 몇 개 지명이 생겼다. 결국 운하를 파지 못하여 원통하다고 하여 원통이 고개라 한 것이 원통현(圓通峴)으로 변했고, 물을 넘기려 했다가 해서 무넘이고개라 했는데 그것이 한자 뜻 그대로 수월(水越峴)이란 지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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